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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환상 문학 15 (미성년자) 랠리 씀

안중재 - 나리타에서 너

비환상 문학
15













  58. 당신과 나 (From.정국)



  당신은 나의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내게 언제부터 당신을 사랑했느냐고 물어온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처음 나를 찾아온 날일 거라고. 나를 가둬놓았던 현관문이 열리던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고 말이다.

  문 앞에 서서 겁먹은 눈으로 내게 했던 첫마디가 생생하다. “어… 정국아 안녕?” 내 눈치를 보며 통통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그날 당신에게 반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말을 할 때마다 머뭇거리는 당신 역시 나를 동정하고 있을까 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녀석을 대하듯 선심을 쓰는 것일까 봐. 바보 같은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자꾸만 나를 두드렸다. 당신은 내게 웃는 얼굴과 우는 모습, 당황한 표정과 수줍은 미소를 모두 보여줬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대를 보며 생전 처음 드는 생각들이 낯설었다.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처음일 거라고 확신했다.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붉어지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당신은 나의 진짜 선생님이 되어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선생님 말고 다른 어떤 것도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당신을 그리다가 잠들면 어김없이 꿈속에 나타났다. 당신은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나는 꿈속에서 당신과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매일 새벽 잠들기 전에 기도했다. 또 꿈을 꾸게 해주세요. 제발 내게 나타나 주세요. 그러면 다음 날에도 당신은 내게 와주었다. 거짓말 같은 꿈이었다. 눈을 뜨면 당신이 아스라이 사라졌다. 시계를 보면 늘 아침이었다. 세 시간도 채 못 잤으면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곱디고운 당신을 보는 것은 내가 학교에 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꿈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며 당신을 향한 욕심이 눈덩이처럼 불었다.



  당신을 보면 우울했다. 그건 슬픔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우울했다. 누군가가 이토록 좋아진 적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대로 했다. 내 시야 안에서 움직이는 당신을 따라갔다. 당신은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걷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나는 따라가던 걸 멈추고 딴청을 피웠다. 우스운 일이다. 그곳은 교직원 공간밖에 없는 층의 복도였고, 나는 전혀 그곳과 상관없는 학생이다. 내가 당신 말고는 이 복도를 걸어갈 용건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당신은 나를 향해 한번 웃어주고는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나는 또다시 당신의 뒤를 따랐다. 발걸음이 조금 더 느려졌다는 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사무실 안에 들어가는 당신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당신이 나오면 다시 따라갔다. 당신이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양치를 하면, 나는 문 앞에 서서 물소리를 들으며 또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지루한 적 없었다. 내가 그렇게 졸졸 쫓아다니는데도 당신은 내게 이유를 묻거나, 가라거나,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이 복작였다.



  당신과 처음 키스하던 날, 하마터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 뻔했다. 당신과 입 맞추는 꿈을 너무 많이 꿔서 이젠 현실과 분간이 안 되는 건가 싶었다. 폭신한 입술과 뜨겁고 축축한 혀, 그리고 당신의 온몸에서 풍기는 향긋함이 알려주었다. 내가 지금 당신과 키스하고 있다고. 뺨을 감싸 쥔 손이 덜덜 떨릴까 봐 온 힘을 다해 참았다. 닿은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질까 봐 삼켰다. 당신의 몸을 꽉 끌어안고 정신을 놓을 정도로 뜨겁게 숨을 나눴다.

  그리고 당신의 몸을 안은 날,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

  벌어진 두 다리가 내 허리에 둘렸다. 좁고 따뜻한 몸 안으로 내 것이 들어가는 순간의 짜릿함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가득 당신을 채워주고 싶었다. 오직 나 하나만 올려다보며 신음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당신의 모습이 나를 한계로 떠밀었다. 더 울리고 싶기도, 달래고 싶기도 했다. 이대로 미쳐서, 몇 번이나 당신을 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국아.’

  선생님, 당신만 있으면 다 될 것 같다.

  나는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나 자신이 처음으로 미웠다. 혹시 내가 당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당신 앞에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이 평범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나를 떠날 수도 있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슬퍼했다. 어떤 경우가 생기더라도 모든 원인은 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 이름을 더는 불러주지 않는 상상을 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차근차근 정리가 필요했다.



  당신을 눕혀놓고 가게에 나갔다. 실장 형들이 나를 보자마자 왜 늦었냐며 타박했다. 금세 룸 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해졌다. 나는 옷에 밸 담배 냄새를 걱정했다. 당신의 공간에 침범한 내가 혹시라도 당신의 옷자락 하나라도 상하게 할까 봐 겁났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교정을 거닐며 햇빛 아래에 반짝이는 당신을 떠올렸다.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얼굴이 머릿속에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된다. 나는 아름다운 당신을 무한히 보기 위해 필름을 되감고, 되감고, 또 되감는다. 당신의 미소로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반짝임으로 물든다. 거무죽죽한 이 공간에 앉아있는 내가 몹시 싫어졌다. 당신과 달리 달빛을 보며 출근하고, 번잡하게 깜빡이는 네온사인 아래에 있는 내 모습을 더는 견디기가 힘들다.  

  ‘형, 나 구좌 정리해줘요.’

  이곳을 정리하고 나서는 무얼 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

  ‘새끼, 이럴 줄 알았어. 계속 안 나온다 했지.’
  ‘죄송해요.’
  ‘그래 인마. 결석비랑 벌금 까고 계산해줄게. 괜찮지?’
  ‘네.’
  ‘앞으론 뭐하게? 이만큼 버는 데도 없어.’
  
  그냥, 좋은 사람 되려고요.

  내 말에 다른 형들이 연기를 뻐끔대며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 내 머리통을 쓰다듬다가 뒷목을 주물렀다. 연애하냐? 좋을 때다. 헤어지고 돈 떨어지면 또 와. 나는 덩그러니 앉아 그들이 하는 농담을 들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안 헤어져요. 절대로.



  계단을 올랐다. 한창 술에 취한 사람들이 몰려올 시각이었다. 가게를 빠져나와 입구를 바라보고 섰더니, 현관을 지키던 덩치 좋은 형들이 어딜 가냐고 물었다. 저 갈게요, 하고 대답하고 돌아섰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터덜터덜 걸었다. 지폐 뭉치가 든 봉투가 손끝에 걸린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냈던 보증금 200만 원에서 벌금 명목의 돈을 내놓고 나니 남은 것은 130만 원이다. 발걸음을 점점 빨리했다.

  눈에 보이는 상점에 들어가 유리 진열대 너머에 빛나는 반지를 바라본다. 작은 손을 떠올렸다. 당신이 잠든 사이 몇 번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반지 사이즈를 가늠했다. 손가락 굵기는 나와 비슷했는데, 몇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점원에게 사이즈를 애매하게 설명했다. 이 정도, 이쯤 되는 것 같아요. 점원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어느 손가락에 하는 거예요? 사랑하면.”

  내 물음에 점원이 대답했다.

  “보통은 왼손 약지에 해요. 결혼반지나 커플링이요.”

  그리곤 농담조로 덧붙인다.

  “여자친구분 약지랑 남자분 새끼손가락이랑 호수가 같으면 천생연분이래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여자친구가 아니라서요.”

  그러자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꾹 다문다. 나는 심플한 디자인의 커플링을 골랐다. 가운데에 큐빅이 박힌 화이트골드 링이 당신의 손가락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조금 고민하다가 새끼손가락에 맞는 호수의 반지 두 개를 주문했다. 사이즈는 같다. 반지가 담긴 작은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심장이 뛰었다.



  딱 하루만 데리고 도망쳐달라는 당신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뭐라고 당신을 구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수 있다. 나중에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면 지금보다 많이, 더 많이 해줄 것이다. 무엇이든 다.

  당신을 옆에 태우고 운전대를 잡는다. 아직 한밤중이다. 당신은 말없이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손을 뻗어 당신의 마른 손을 찾아 잡았다. 스르르 깍지를 끼워오는 느낌이 좋아 슬며시 웃는다. 밤이 되자 조금 쌀쌀한지 손이 차갑다. 히터를 틀었다. 은은한 향기가 퍼진다. 차 안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없음에도 좋은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당신의 목소리를 상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신의 기분이 나아지면, 내게 나긋하게 말을 걸어줄 것이 분명하니까.



  동해에 도착했다. 창문을 열자 바닷바람과 함께 비린내가 났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뿌릴 때도 이런 냄새가 났다. 배를 타고 잠잠한 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할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실은 내게 바다는 슬픈 기억이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용기를 냈다. 당신과 함께 해가 뜨는 광경을 보고 싶다. 당신을 바다에 자랑하고 싶다. 저기 바다 어딘가에서 유영하고 있을 할아버지가 볼 수 있도록.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나 선생님이랑 일출 보고 싶었어요.”
  “좋다. 힐링 될 것 같아.”

  당신이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운전하는 내내 상상했던 당신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내가 당신을 구해주는 게 아니라, 당신의 목소리가 날 구한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시트를 조금 젖힌 채 기대고 있는 당신의 얼굴로 향했다. 따뜻한 입술을 감춰 물었다. 내 손이 당신의 따끈한 목덜미를 감쌌다.

  내 목을 끌어안고 당기는 힘을 느끼며 당신의 몸 위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덧 내가 당신이 앉아있는 자리로 넘어가 몸을 겹쳤다. 레버를 당겨 시트를 조금 더 젖혔다. 눕혀진 당신 위에 올라타 정신없이 입 맞췄다. 나는 밤새 키스만 하라고 해도 할 수 있다. 당신의 모든 것이 소중해서 입안에 넣고 한참을 녹여 먹고 싶다.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비수기라 방이 텅텅 비어있었다. 나는 반지를 사고 남은 돈을 꺼내 비용을 지불했다. 당신이 놀라서 눈을 또 크게 뜬다. 내 손목을 잡고 저지하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을 거둔다. 얼마 전에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 모양이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당신에게 남자이고 싶다.

  따뜻한 물로 함께 샤워하고,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자그마한 머리통에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가늘고 긴 목덜미와 그곳에 나 있는 점을 보다가 대뜸 입을 맞췄다. 그러자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츠린다. 그 바람에 입고 있던 가운이 흘러 내렸다.

  당신의 허리를 감싼 채로 침대 위에 누웠다. 목덜미부터 차근차근 입을 맞춰 내려갔다. 몇 번이나 내게 안겼으면서 수줍은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는다. 얼굴이 조금 붉다.

  “부끄러워요?”
  “응….”
  “같이 샤워도 했으면서.”
  “침대에선 조금 달라. 이상하게.”
  
  네가 너무 낯선 남자 같아서 그래. 덧붙이는 그 말에 또다시 주체 못 할 감정이 피어오른다. 우리의 지난밤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내 아래에서 흐느끼듯 신음하는 선생님을 낯설다고 생각했었다. 우린 똑같은 생각을 한 거다.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입술을 살짝 깨물어주었다. 아프다고 찡그리는 얼굴조차 사랑스럽다.

  당신의 열 오른 몸 구석구석을 핥았다. 지분거리는 손길에 가늘게 신음이 터진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당신이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서로의 몸에 대해 알아갈수록 더 갈증이 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다 알고 싶단 생각이 든다. 왜 내가 당신이 될 수 없는지, 참 아쉽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차라리 내가 박지민이 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그럼 영원히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다.

  우리의 몸이 끝없는 접촉으로 빨갛게 물들어간다. 당신의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질척거리게 핥아 올렸다. 나로 인해 활짝 벌어진 다리가 부끄러운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다. 몸을 들어 장난스럽게 그 손을 잡아 내리자 눈꼬리가 길게 늘어진 눈으로 나를 째려본다.  

  “다 핥아먹고 싶다. 쌤.”
  “그러고 있잖아.”
  “발가락 하나하나 다.”
  “흐응… 그건 좀 싫은 것 같아.”
  “농담이에요.”

  그런 야한 농담도 할 줄 알아? 하며 원망스럽게 물어온다.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웃었다. “웃지 마 바보야. 선생님 놀리기나 하고.” 투덜거리는 얼굴이 귀엽다. 나는 새삼 우리가 같은 성을 가졌다는 게 신기하다. 단 한 번도 남자와 이렇게 관계를 가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우리는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다. 우리 둘만 가지고 있는, 그런 비밀이다.

  어느새 우리의 상체가 가깝게 마주 닿았다. 자연스럽게 내 어깨 위에 걸쳐진 채 눌려있는 당신의 다리가 느껴진다. 하얀 종아리를 손으로 살살 쓰다듬어 주며 움직였다. 반쯤 눈이 감긴 채로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왠지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상체를 세웠다.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당신이 애처롭게 손을 뻗어 내 허벅지를 찾아 잡는다. 어쩐지 필사적인 손짓에 행동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만할까요?”
  “아니. 더 해줘.”
  “쌤… 너무 야하다 오늘.”

  내 말에 푸흣 웃으며 대답한다. 일탈이잖아 오늘.

  당신은 무릎을 세워 들고 있는 내 몸짓에 맞게 새된 소리를 뱉는다. 움직일 때마다 당신의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에 수를 놓는다. 정국아, 정국, 정국아. 아아, 좋아. 으응.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좋다고 하면 내가 절대로 멈출 수가 없는데.

  “일출 볼 수 있을까? 나 기절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술을 찾는다. 나는 매끄러운 아랫입술을 핥아주며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밤이 길어 당신을 한 번 안는 것으론 모자랄 것 같다. 함께 온 여행이란 게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고, 없던 기운도 나게 만드는 듯하다.

  “사랑한다고 말 해줘요.”
  “사랑해 정국아.”
  “다 가졌다. 진짜….”

  어쩌면 당신은 할아버지가 내게 보내준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면 당신을 설명할 길이 없다. 박지민은 전정국의 판타지를 모두 모아 빚어낸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어느새 내 전부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59. 운명 (From.정국)



  침대에 아무렇게나 뒤엉켜 잠들었다가 알람 소리를 듣고 번쩍 눈을 떴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섰다. 옷도 입지 않고, 몸 위에 커다란 차렵이불을 칭칭 감은 채로 일출을 기다렸다. 여섯 시가 가까워지자 저 멀리서 태양이 떠올랐다. 마침 일기가 좋아 아주 선명한 붉은 빛이 돌았다. 우리는 나란히 선 채로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본다.

  당신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유를 묻지 못하고 뒤에서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당신의 눈에서 동그란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말없이 당신에게 뺨을 비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끅끅 소리를 내며 울다가 뒤를 돌아 나를 포옹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당신이 내게 안긴 채로 어린애처럼 한참이나 훌쩍거렸다. 다행히도 그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다 울었어요?”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눈자위와 코끝이 빨갛다.

  “아기 같네. 우리 담임 쌤, 몇 살이야.”
  
  농담을 하자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톡 때린다.

  “뚝 그쳤으니까 선물 줄게요.”

  나는 아까부터 꽉 쥐고 있던 손바닥을 당신의 눈앞에서 활짝 열어보였다.
  
  “뭐야?”
  “커플링.”
  “산 거야?”
  “오다가 주웠을까 봐?”

  반지를 보자 당황했는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는 경건한 의식을 하듯 당신의 왼손을 잡았다. 당신의 귀여운 새끼손가락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부족함 없이 꼭 맞았다.

  “왜 새끼손가락인지 물어봐도 돼?”

  당신이 내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물었다. 사이즈가 같은 반지를 나눠 낀 손을 쫙 펴서 나란히 옆에 두었다. 우리의 손에서 같은 반지가 빛난다.

  “붉은 실 대신이에요.”

  나는 믿는다. 당신과 내가 운명이라고.

  “운명이었으면 좋겠어서….”

  우리의 새끼손가락이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런 전설을 들은 적 있다. 그땐 그게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알겠다.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고 하니까. 나는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 거니까.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줄게요.”
  “고마워 정국아.”

  이다음에는 당신의 약지에 끼워주고 싶다.

  당신이 내 몸을 가득 끌어안는다. 우리는 같은 반지를 낀 손을 맞잡고 길게 입을 맞췄다. 따뜻한 태양 아래에서 바다내음을 한껏 머금은 키스였다. 당신을 데리고 여기까지 도망쳤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면, 더 좋은 사람이 되면, 그때는 이곳에서 당신에게 고백할 것이다.

  선생님, 나랑 평생 같이 살래요?






















  
* 랠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8-04-24 16:37)
피터팬  | 180405  삭제
비밀댓글입니다
피치  | 180406  삭제
비밀댓글입니다
랠앓계  | 180406  삭제
아 이번편은 진짜 텍스트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랠리님.. 특히 시작부분에서 너무 좋아해서 우울하다는 대사가 제 심장을 쿵 하고 한번 쳤고 이번편을 약간 그림으로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상상이 다 된달까요
둘의 첫 만남부터 현재 관계까지 오면서 정국이의 속마음이 어땠는지 알 수 있던 내용이예요 ㅠㅜㅠㅠ 다른편도 그랬지만 유독 이번 내용은 더 보듬어야 할 것 같고 더 소중하고 더 몽글몽글 한 느낌이 진짜 강하게 와요... 저 진짜 비환상 문학 매 편마다 심장 쥐어잡고 읽습니다 ㅠㅁㅜ 제 부족한 감상평이지만 그래두 제 댓글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셨으면 좋겠다는.. 그런.. 그런 혼자만의 바램...
 | 180407  삭제
선생님... ㅜㅜㅜ 감사합니다 요즘 제 삶의 이유입니다 이작품
김지혜  | 180428   
비밀댓글입니다
이유진ㄴ  | 180505  삭제
서로가 삶의 도피처가 되는 사랑 정말 최고예요. 랠리밈 이번 편은 너무 따뜻하고 사랑스러웠어요ㅜㅜㅜ 흑 감사합니다.
프링  | 180730   
비밀댓글입니다
뻐꾸기  | 180902   
친절한 랠리님♡♡♡♡♡
랠리작가님열성팬  | 181009  삭제
정말 랠리 작가님의 글이 제게 요즘 삶의 재미입니다ㅠㅠ!❤❤❤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엄지공주  | 190107   
비밀댓글입니다
뜨아  | 190619   
비밀댓글입니다
뜨아  | 190619   
비밀댓글입니다
행복하트치어링  | 191002   
비밀댓글입니다
Rorin  | 191104   
진짜.. 왜 새끼손가락에 맞을 사이즈로 샀을까 했는데 그게 붉은실을 의미하는거였네요 다시한번 마음속에 문구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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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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