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서적

ALL 돌연변이 (54) 아는 애 (27) 아마겟돈 (33)
아마겟돈 18 (미성년자) 랠리 씀

Lobotomy corp OST – All Warnings

아마겟돈
18


‘사탄’과의 전쟁















 - 치직. 귀소 송신 바람.

 키 작은 남자가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는 겁먹은 얼굴로 탈색머리 무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탈색머리가 정국의 배로 향하고 있는 총구를 옮겨 작은 남자의 머리에 겨누었다.

 “얼른 송신해 새끼야.”
 “아흐… 네! 당소 송신 확인.”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작은 남자는 통신병인 듯했다. 지금은 주검이 되어 흙바닥 묻혀 있는 군인들은 산 속의 정해진 구역을 정찰 중 탈색머리 무리를 만나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산 속에 자리 잡기 위해 통신병 하나만 살려놓은 것이다. 시시각각 날아오는 무전에 응답하지 않으면 다른 구역에 위치한 군인들이 금세 몰려오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가평으로 MT를 왔다가 이 사달을 맞았다. 산 속에 자리를 잡은 지는 사흘째. 그간 계엄군에게서 빼앗은 보급품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나 그들이 차지한 이곳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조만간 보급물자를 전해주기 위해 다른 군인들이 찾아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생존해야 할 공간을 옮겨야 할 처지에 놓인 이들은 애먼 통신병에게 스트레스를 풀었다. 볼모로 잡아놓고 지속적인 구타를 하며 간신히 목숨만 붙여놓는 것이었다. 앞날이 보장되지 않은 불안 속에서 점점 인간성을 잃어갔다.

 - 차량번호 합 213 다시 02 탈취 용의자, 25 다 구역으로 도주 가능성 있으니 경계 바람. 치직.

 “뭐야. 이거 네 얘기냐?”

 무전을 들은 탈색머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정국에게 물었다. 정국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녀석은 정국의 태도에 표정을 구기고는 애꿎은 통신병의 머리를 총대로 내려치며 패악을 부렸다.

 “빨리 무전 답해 새끼야.”
 “으윽, 네…. 당소 확인.”

 - 치직. 용의자 외 2명 이상으로 추정. 용의자 반드시 생포하라. 통신망의 사진 확인요함.
 
 그 소릴 들은 정국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터졌다. 다행히 영상이 제대로 전송된 모양이었다. 벌써 군 통신망에 사진이 올라와 생포 명령이 떨어진 걸 보니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다. 그들은 정국의 몸을 필요로 했다. 탈색머리는 통신병이 가지고 있던 작전 폰을 열어 업로드 된 사진을 확인했다. 영상 속 정국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을 캡쳐해서 크롭해 놓은 사진이었다.

 “너 뭔데?”
 “뭐가.”
 “너 뭔데 얘네가 생포하라고 하냐고.”
 “내가 알아?”

 스스로를 산적이라고 칭하던 이들에게 자신이 면역체인 것까지 구구절절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눈앞이 캄캄한 이 상황에서, 가능하면 이 생존자들도 함께 구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녀석들의 태도는 사람의 마음을 영 그러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탈색머리는 정국에게로 다시 총구를 들이댔다.

 “어쩌냐. 생포되기 전에 우리한테 죽을 텐데.”
 “뭐?”

 심지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하고 있다. 같은 도망자 처지에 왜 이러는 거지? 

 “총 치워.”
 “이거 간뎅이가 부은 새끼네?”

 탈색머리는 총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정국의 태도에 심기가 불편한지 괜히 통신병의 정강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아무래도 정국은 총을 둘러메고 있으니 쉽게 손대지 못했다. 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통신병을 보며 정국은 미간을 좁혔다.

 “뭐 중요한 기밀이라도 가지고 있나 본데?”
 “…….”
 “좋아, 뒤져보지.”

 그 말을 한 탈색머리가 뒤에 있던 녀석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녀석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지민과 진규에게 달려들었다. 진규는 힘이 없는지 바닥에 늘어진 채로 신음만 흘렸고, 지민은 낯선 이들이 제 몸을 만지는 것이 싫어서 움츠리며 거부했다. 녀석들 중 하나가 지민의 목을 뒤에서 조르며 팔을 결박했다. 숨이 막혀서 발버둥치는 지민의 발목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세 명이 달려들었다.

 “으읍!”

 비에 젖어 바짝 달라붙어 있는 옷을 마구 뒤지는 행동에 지민은 숨통이 막히는 걸 겨우 참으며 반항했다. 거친 몸부림에 티셔츠가 조금 찢어지고 바지가 반쯤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정국의 눈빛이 사납게 뜨였다. 그러나 당장 몸을 움직이려는 것을 탈색머리가 막아섰다. 녀석이 총구를 정국의 이마에 가져다 대며 비죽 웃었다.

 “겁 대가리가 없어?”

 정국이 형형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있는 총구를 손으로 잡았다. 더 이상 이 패악질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뭐야. 죽고 싶냐?”

 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정국의 태도에 탈색머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정국은 당장 눈앞의 놈을 찢어죽일 수도 있을 기분이었다. 총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섣불리 손대지 못하는 녀석을 보니 어떤 예감이 드는 것도 같다.

 “너 총알 없지.”
 “뭐, 뭐라는 거야!”

 그때, 정국의 배낭을 뒤지려는 놈들을 막기 위해 지민이 몸을 날렸다. 총알이 없냐는 물음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배낭 안에 있는 탄창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총과 총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같은 생존자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놈들에게 빼앗긴다면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지민은 배낭을 꽉 끌어안은 채로 버텼다. 녀석들이 떼어내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이 새끼가!”
 “으윽!”

 한 놈이 지민의 머리채를 잡고 세게 당겼다. 지민은 뒷머리가 뽑혀져 나가는 고통에 신음을 질렀다. 그러자 진규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기어와 힘을 보탰다. 반드시 배낭 안의 총알을 사수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놈들이 두 사람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정국은 눈알이 뒤집힐 것 같은 분노에 쥐고 있던 총구를 옆으로 확 치워내고는 탈색머리의 복부를 세게 걷어찼다. 제대로 얻어맞은 녀석이 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배를 감싸며 몸을 숙였다. 철컥. 정국은 둘러메고 있던 총을 빠르게 장전한 뒤 겨눴다.

 탕!

 “아악!!!”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와 함께 탈색머리가 어깨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정국이 가까이서 쏜 총알은 녀석의 어깨뼈를 부수고 살점을 현란하게 찢으며 관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지민과 진규를 때리던 녀석들이 행동을 멈추고 재빨리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들어 두 사람의 목에 가져다 댔다.

 “씨발…. 총 내려놔…!!”

 한 놈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정국에게 소리쳤다. 머릿속이 새빨갛게 물드는 기분이 든 정국은 놈들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다른 놈들 둘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연달아 터진 총성과 함께 두 놈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사위가 캄캄한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각자 팔과 다리에 총을 맞은 녀석들은 시뻘건 피를 줄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통신병의 무전기가 울렸다.

 - 치직. 25 나, 다, 라 구역 방향 총성 확인. 이상 있나?

 정국이 날카로운 눈으로 통신병을 내려다보았다. 음산한 정국의 표정에 겁먹은 그가 몸을 덜덜 떨며 무전에 응답했다.

 “25 다 구역, 사탄 발견으로 사살 중입니다….”
 - 확인. 치직. 불침번 인원 보고 바람.
 “당소, 불침번 정원 4명 이상 없음.”
 - 확인.

 통신병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정국이 피식 웃었다.

 “칼 계속 들고 있을 건가?”
 “미, 미친 새끼….”
 “지금 너희 대가리 날리는 게 오락실에서 인형 따는 것보다 쉬워.”

 고저 없이 싸늘한 정국의 말투에 나머지 두 놈이 칼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바람에 지민의 목에 생채기가 났는지 “으읏….” 하며 신음을 흘렸다. 정국의 눈동자에 불길이 올랐다. 정국은 가늠쇠를 바라보며 녀석의 머리를 향해 조준했다. 숲속의 무성한 잎사귀 틈으로 비추는 달빛이 마치 과녁을 만들어주는 듯하다. 계엄군부터가 미쳐버린 이 판국에 믿을 사람은 역시 없는 걸까. 같은 생존자끼리 왜 이러는 거지? 분노가 절절 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벌써 녀석들의 머리에 몇 번이고 총을 갈겼지만, 저들에게 붙잡힌 채 공포가 가득 서린 눈동자로 떨고 있는 지민과 시선을 맞추자 충동을 꾹 삼켜야 했다.

 여기서 놈들을 죽인다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겠지.
 그리고 지민이 넌 나에게 아마 실망할 테고.

 “셋 셀 때까지 칼 안 내려 놓으면 너희는 죽어.”

 그러니 기회를 줄 때 눈치껏 해.

 셋, 둘. 정국이 조용히 숫자를 카운트하자 놈들이 동요했다. 그리고는 하나를 외치기 전에 들고 있던 칼을 재빨리 떼어내며 바닥으로 던졌다. 그와 동시에 정국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놈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괴성을 지르며 널브러지는 것을 보며 지민에게 상처를 입힌 녀석이 바닥을 기다시피 도망치려 했다. 정국은 침착하게 가늠쇠를 놈의 허벅지에 조준했다. 타앙! 굉음과 함께 녀석의 허벅지에서 피가 솟구쳤다.

 “흐으! 으아아!!”

 정국은 총알이 박힌 다리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손등 위에 운동화를 가져다대고 짓밟았다. 손과 함께 허벅지의 총상이 함께 눌리며 녀석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잘못 건드렸어.”
 “으윽! 큭…!”
 “같이 살자고 빌었어야지. 감히 누굴 건드려.”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허벅지 위를 푹, 세게 밟았다. 자지러지는 소릴 뒤로한 정국이 주저앉아 떨고 있는 지민에게 다가갔다. 흰 목 위에 칼에 베인 상처가 나 있는 걸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화를 꾹 눌러 담으며 정국이 가방을 뒤져 물에 젖어 눅눅해진 상자를 꺼냈다. 지민이 약국에서 챙겼던 뽀로로 밴드를 조심스럽게 붙여주는 손길은 조금 전 녀석들의 몸에 총상을 입힌 사람답지 않게 차분했다.

 “선배….”
 “응.”
 “…….”
 “나 또라이 같았지?”
 “…아니.”
 “또라이 맞는 것 같아. 하마터면 다 죽일 뻔했거든.”

 정국의 눈매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지민은 얼른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안았다. 조금 흥분한 듯 숨을 거칠게 내쉬는 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정국이 분노의 여파로 씩씩거리고 있다는 것을 안 지민이 위로하듯 그의 축축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정국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했다. 순간적으로 들끓었던 감정들을 천천히 되새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의는 무엇일까. 마음속에서 점점 흐려지는 것 같다. 분명히 비정상적인 것들을 싫어했는데, 이미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에 닥치니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최악이 되지만 않으면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앞으로 자신들을 건드는 이가 있으면 이보다 더한 짓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






 총에 맞아 쓰러진 녀석들을 모아서 구덩이 안에 던져 넣었다. 산 속에는 여러 개의 참호가 존재했다. 아마도 참호전투훈련이 종종 있었던 흔적일 것이다. 정국은 군대에 있을 때 동기 녀석들이 왜 산 속에 구덩이를 파게하고 지랄이냐면서 삽으로 흙을 퍼내며 욕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뻘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깊은 구덩이들이 제법 쓸 만했다. 며칠간 탈색머리의 무리는 참호 안에 몸을 숨기며 지냈던 모양이다.

 정국은 참호 안에서 뒤엉킨 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녀석들에게 드레싱키트와 붕대를 던져주었다.

 “알아서들 치료하고, 기어 나올 힘 있으면 나와.”
 “씨발, 병 주고 약 주냐?!”
 “목숨 붙어있는 걸 감사히 여겨.”
 “차라리 죽여 이 새끼야! 반병신 만들어 놓고 감사히 여기라고?”
 “나도 죽이고 싶은데, 그럼 누가 실망할 것 같거든.”

 정국은 참호 아래로 연결된 그물을 걷어다가 구덩이 위를 덮었다. 그리곤 낙엽을 한가득 끌어다 덮어씌웠다. 사탄이 등장할 것을 대비한 마지막 배려였다. 어차피 날이 밝으면 면역체를 생포하기 위해 군인들이 나타날 테니,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닐지는 미지수다.

 진규는 끙끙 앓다가 근처의 참호로 들어가 몸을 뉘였다. 생사가 몇 번이나 오갔던 탓에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버렸는지 금세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정국은 배낭을 뒤적여 참치 통조림 하나를 통신병에게 건넸다.

 “총소리가 요란해도 사탄이 안 나타나네.”
 “부대원들이 많이 정리했어요.”
 “저 새끼들이 다 죽인 거야? 부대원들.”
 “…네.”

 통신병은 참치 캔을 뜯다 말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수색대예요. 생존자 찾아서 데려가는 임무거든요. 근데 저 사람들이 다짜고짜 공격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다 죽었어요.”
 “생존자를 데려간다고? 죽이는 게 아니라?”
 “생존자를 죽이다니요?”
 “하….”
 “저 탈색머리 놈도 그런 소리 했는데…. 군인이 민간인을 죽였다고요. 저흰 그런 적 없어요.”

 수색대원들은 생존자를 죽이는 것 외에 다른 임무를 하고 있었나 보다. 계엄군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생존자를 어디로 데려가지?”
 “계엄사령부 아지트요.”
 “데려가서 뭐하는데?”
 “그건 저도 잘…. 구해주려는 거겠죠?”

 같은 계엄군 내에서도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통신병의 팔뚝에는 보라색 완장이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계엄사령부의 예하부대인 경비군이다. 아무래도 일반인에 가까운 병사계급을 가진 자들에게는 가학적인 임무가 주어지진 않은 것 같았다. 정국은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리를 굴렸다. 한 쪽에서는 생존자를 죽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생존자를 데리고 간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통신병은 캔을 따자마자 허겁지겁 손으로 참치를 퍼먹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전쟁통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피골이 상접해서 먹을 것을 급하게 욱여넣는 모습으로 보아 탈색무리의 머리가 보급품을 다 빼앗느라 며칠 동안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통신병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긁적이며 정국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보급물자 들어오는 날이 언제야?”
 “어… 모레요. 안 그래도 저 사람들이 또 다 죽일까봐 걱정했어요. 휴우.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통신병의 대답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 하지만 그 전에 아마 발각될 것이다. 해가 뜨면 계엄군들이 정국을 찾기 위해 온 산을 뒤질 테니 말이다. 아까 들었던 무전에서도 정국을 ‘용의자’로 칭하며 예상 탈주경로를 말했다. 25 다 구역. 그들이 말하고 있는 곳은 바로 여기였다. 강에 빠진 지프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도 금방 알아챌 테고, 한밤중에 비오는 숲 속으로 도망친 것으로 예상했다면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정국은 그들에게 생포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다. 산으로 도망친 것은 단지 아무 말도 해보지 못하고 개죽음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계엄군에게 면역체의 존재를 각인시킬 시간을 버는 것으로 족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에 통신병이 있으니 군 측에 연락할 방법이 매우 쉬워졌다는 것이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왜 형님을 특정해서 생포하라고 하는 거죠? 그런 명령은 처음이었어요. 차량 탈취 용의자라고 했는데….”

 어느새 통신병은 정국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무척 궁금하다는 듯 눈을 땡그랗게 뜨는 모습을 보고 정국은 나뭇가지로 바닥을 의미 없이 툭툭 때리며 대꾸했다.

 “면역체.”

 짧은 그의 대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모양이다. 통신병의 눈이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빛났다.

 “들은 적 있어요. 계엄사령부 아지트에 박사랑 연구원들이 들어왔다고 했거든요. 이제 백신을 만들어줄 거니까 안심하라고 했어요.”

 정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통신병의 입에서 나온 말에 조금 안심되었다. 이 역시 예상대로다. 생포명령을 내린 것을 알게 되었으니 살 길이 보이는 것 같다. 적어도 당장 죽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한 구석에는 불안함이 잔잔하게 남아 있었다. 군인들에게 끌려가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몸에 있는 면역력을 이용해서 치료제든 뭐든 개발하고 나면 과연 풀어줄까? 아니 그보다, 이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를 정말로 잠재울 수 있을까. 무엇도 단정할 수 없다. 입 안이 까끌했다.

 “내일 해 뜨면 네가 무전 좀 쳐줘야겠다.”
 “무슨 무전이요?”
 “나 잡으러 오라고.”

 그 말에 통신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오래 못 버티는 거, 매도 빨리 맞는 게 낫겠지.”

 정국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열었다. 밤 열한 시. 얼마 남지 않았다.

 “너 이름이 뭐냐.”
 “저는 김준성이라고 합니다.”
 “그래 준성아. 잘 들어. 계엄군은 생존자들을 다 죽이고 있어.”
 “네? 그게 무슨….”
 “우리도 쫓기다가 여기까지 왔어. 저 놈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나도 언젠간 죽일지도 몰라. 그리고 너희도 마찬가지야. 계엄사령부는 미친놈들이거든.”
 “흐엑…!”
 “나중에 살아서 또 만나자. 사탄한테 물리지 말고 잘 버텨.”
 “혀,형님 이름도 알려주세요.”
 “나, 전정국.”
 
 정국은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지민의 손을 찾아 잡았다.

 “형님만 있으면… 이제 우리 사탄한테서 안전한 건가요?”

 준성의 물음에 정국은 턱을 비틀며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에게 남은 생수를 건네주고는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새까만 암흑이 더욱더 짙어지는 밤, 해가 뜨면 바뀔 처지 앞에 놓인 순간이다. 정국은 휴식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가 지민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두 사람은 삐거덕거리는 몸을 끌며 숲을 헤쳤다.





*






 비가 그쳐 맑게 갠 하늘에 빛이 떠올랐다. 정국은 우거진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풀벌레와 새 소리는 닥친 상황과는 다르게 평화롭기만 했다. 정국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켰다. 마치 캠핑이라도 한 것 같다. 벌레에 물어뜯긴 팔을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탄이 나타날 걸 대비해 그물로 덮어놓은 참호를 열어 보니 진규와 준성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기상.”

 정국이 손뼉을 치며 깨우자 퉁퉁 부은 진규가 눈을 껌뻑이며 깨어났다. 준성 역시 정신이 드는지 멍하게 눈을 껌뻑였다. 그들에게 손을 뻗어 바깥으로 꺼내준 정국은 조용히 눈을 껌뻑이고 있는 지민과 눈을 맞췄다.

 “굿 모닝.”

 밝은 데서 보니 지민의 상태는 더 엉망이었다. 걸레짝이 되어버린 티셔츠 사이로 군데군데 생긴 상처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붉은 자국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정국은 배낭을 뒤적여 제일 아래쪽에 챙겨두었던 자신의 티셔츠를 지민에게 입혔다. 사이즈가 커서 헐렁한 옷을 뒤집어 쓴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선배 옷도….”

 지민이 핏물이 든 정국의 티셔츠 자락을 붙잡자 정국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벗고 있어도 안 야해.”

 그 말은 곧 지민의 꼴이 야하단 뜻이기도 했다. 지민은 뺨을 붉히며 손으로 제 뒷목을 쓰다듬었다. 빗물이 말라 푸석푸석해진 지민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준 정국이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어정쩡하게 서 있는 준성에게 어깨동무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무전 칠 시간이 왔네.”

 태연한 척 했지만 정국은 많이 긴장한 상태였다. 이제 무전을 보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도망자 신세도 끝나고, 아마 이 끝없는 바이러스 사태도 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준성은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무전기를 손에 쥐었다. 그리곤 허락을 구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정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널을 만진 준성이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당소, 보고사항 있습니다.”

 무전을 보내자 잠시 뒤 치직 소리와 함께 응답이 왔다.

 - 귀소, 보고 바람.

 정국은 그에게서 무전기를 받아들고 숨을 가다듬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민에게 시선을 맞춘 채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속으로 몇 번이나 읊어봤던 문장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 결연한 순간은 마치 신성한 행위를 하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여기는 25 다 구역.”

 진규는 차마 그를 보지 못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제 이름은 전정국, 면역체입니다.”

 캄캄한 모험의 시작이었다.





*






 계엄사령관 김통수는 조금 전 무전 내용을 보고받고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의자에 깊게 몸을 묻으며 좋은 향기가 나는 찻잔을 휘휘 저었다. 그는 전정국이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생각할수록 발칙한 놈이다. 자신의 몸이 면역체임을 알고 먼저 군에게 연락을 해온 것도, 계엄군을 기세 좋게 따돌려 놓고는 자신이 있는 곳을 읊으며 무전을 보내온 것도 보통 녀석의 행동이 아니다. 계엄군이 자신의 몸을 필요로 할 거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은 여태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우습게 볼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서류를 천천히 집어 들어 읽어 내려갔다. 그리곤 눈썹을 꿈틀거리며 제 앞에 각 잡고 서 있는 무장 군인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데려와. 작전장교부터.”

 그의 명령에 거수경례한 사내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끔한 정복을 입은 남자를 데리고 왔다. 남자의 정복 팔뚝에는 계엄사령부를 상징하는 빨간 완장이 채워져 있었고, 견장에는 무궁화 하나가 매달려 있다. 소령으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정복과 계급장에는 한 치의 티끌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는 사령관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앉지.”

 여유롭게 웃은 김통수가 소령을 향해 턱짓하자 그제야 각이 잡힌 팔을 내리고 흔들림 없이 의자에 앉았다. 사령관과 마주보는 위치에 앉은 그는 양 주먹을 쥔 채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군기가 잡힌 모습에 김통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리를 꼬았다.

 “어때, 지금 자리는 할 만한가?”
 “예. 그렇습니다.”

 남자는 얼마 전 계엄군 통합 작전장교인 소령 자리에 올랐다. 실질적으로 해골부대와 예하부대를 통솔하는 통합 작전을 도맡았다.

 “내가 부른 이유는 알겠지.”
 “예.”
 “아주 발칙해. 알고 보니 서종 톨게이트에서 살아난 놈이더라고? 주택에서 수류탄 터뜨린 것도 같은 놈이고.”
 “…….”
 “심지어 경비군 사살한 것까지 이놈이더군. 보통이 아니지.”

 김통수는 정국의 전적에 대해 읊었다. 일주일이 조금 지난 시간 동안 유일하게 계엄군을 골치 아프게 했던 사건의 중심에 모두 정국이 있었다. 게다가 면역체이기까지 하다니, 흥미가 동했다.

 “27보병사단 출신이라니. 이기자 부대에 이런 놈이 있는 줄은 몰랐지 뭐야. 사격 실력도 제법이고, 상황판단도 빨라. 그러니 여태 목숨이 붙어 있겠지. 이런 녀석을 운전병으로 썼다니. 웃음이 다 나더군.”
 “…….”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녀석이 제 몸을 미끼로 던졌어. 우리가 면역체를 찾을 거라는 걸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거야. 걱정이군.”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봤을 때 전정국은 항체를 가진 몸으로 딜을 걸어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태 끈질기게 살아난 놈이 순순히 포기할 리 없지. 그 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령관의 질문에 남자가 눈동자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살 길을 찾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 봐.”
 “아마도 몸을 대가로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고 싶어 할 겁니다.”
 “전국 계엄인 걸 놈도 알았을 텐데, 그깟 딜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억지로 가둬두면 그만인데.”
 “자결하면… 끝이지 않습니까.”
 “흐음….”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라는 걸 알 겁니다. 그런 상황에 닥친 자들에겐 죽음의 공포가 비슷합니다. 죽는 시기는 상관없습니다.”

 자결이라. 작전장교의 말에 김통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보는 눈은 정확할 테니 믿을 수밖에.”
 “…….”
 “계속해.”

 사령관의 말에 남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건 계엄군이 되는 것입니다. 전정국은 아마 그걸 노릴 것입니다.”
 “허허.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
 “예. 반드시 그럴 겁니다. 차라리 잘 된 일입니다.”
 “나쁘진 않다만, 어째서 잘 된 일이라고 단정하지?”
 “야망이 있는 자는 충성도가 높습니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봐도 삶의 의지가 넘칩니다. 말씀하신 대로 사격 실력도 수준급이고 상황 판단이 빠르니 데리고 계시면 나쁘지 않을 겁니다.”

 흔들림 없는 남자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사령관이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집무실 안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작전장교는 변한 없는 자세로 미동 없이 한 곳만 응시했다.

 “그렇단 말이지.”
 “예. 생포해서 필요한 곳에 쓰십시오.”
 “그래도 되겠나?”

 김통수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곤 반지르르하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올리며 인터폰을 눌렀다.

 “지프 준비해.”

 간단하게 말을 전한 그가 천천히 일어나 집무실 창가로 걸어갔다. 학교 건물을 아지트로 사용 중이라 넓은 운동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 모습은 군 연병장과 딱히 다를 것 없었다. 일렬로 서 있는 지프 중에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다시 천천히 작전장교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곤 무궁화 견장이 붙어 있는 그의 어깨에 두터운 손을 올렸다.

 “자네가 직접 잡아와.”





*





 산바람이 불 때마다 울창한 숲이 몸을 비비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정국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참호에 몸을 숨기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전을 보낸 지 20분이 지났다. 슬슬 계엄군이 몰려올 때가 되었다. 그 사이 몇 번의 무전이 왔다. 주로 내용은 전정국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태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준성은 정국이 시키는 대로 착실히 무전에 대답했다. 현재 25 다 구역의 인원은 전멸했으며, 전정국은 발견된 게 아니라 스스로 나타났다고. 현재 그는 총을 가지고 있으며 허튼 짓을 하면 당장 자살하겠다는 내용까지 빠짐없이 전했다. 무전을 받은 쪽은 예상과 다른 상황에 당황하는 듯했다.

 “정국아. 나 진짜 떨려 뒤지겠다.”
 “나도.”
 “후우…. 오자마자 우리 다 죽이면 어떻게 해?”
 “죽이진 않을 거야. 그럼 애초에 생포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중요한 건 잡혀간 다음이지.”
 “너 어떻게 할 생각인데?”
 “지낼 곳을 마련해달라고 해야지. 아지트가 있다고 했어. 거기엔 생존자들도 있대.”
 “생존자?”

 정국의 말에 진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지민 역시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바짝 굳었다. 정국은 지민의 손에 깍지를 꽉 꼈다.

 “생존자들을 왜 데려다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정상적인 이유는 아닐 거야. 계엄사령부엔 싸이코 새끼들만 가득하니까.”
 “허얼…. 막 마루타하는 거 아냐?”

 진규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정국은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마루타? 그래. 만약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다면 생존자를 가지고 이것저것 실험을 할 수도 있다.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판국에 그 정도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제발, 그런 게 아니길 바라야지. 어쨌든 지낼 곳 정도는 해결해주지 않을까? 내 몸이 계속 필요할 테니까.”

 정국은 이를 악 물었다. 침착한 척했지만 지금 정국의 심장박동은 최고 속도로 울리고 있었다. 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다가 맥박소리를 듣고는 정국 역시 떨고 있음을 알아챘다. 지민이 그의 몸을 한가득 안아주었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안 다칠게.”



 한참이 지나자 무전이 또다시 울렸다.

 - 치직. 25 다 구역에 접근 중이다.

 그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지프의 엔진소리가 들렸다. 부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거진 나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산길은 겉보기에는 닦여져 있지 않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한 길이 나 있었다. 적군 방어지대이다 보니 보급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최소한의 길만 내놓고 수풀로 위장을 한 것이다. 정국은 준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점점 엔진소리가 가까워지며 빨간 깃발을 달고 있는 지프가 줄지어 다가왔다.

 정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프의 수는 여섯 대. 생각했던 병력과 비슷했다. 25 다 구역에 접근한 지프가 멈춰 섰다. 산 속을 울리던 소음 대신 엔진의 공회전 소리만 낮게 울렸다. 정국은 총을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만에 하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아니, 갑자기 면역체가 필요 없게 되었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정국의 몸이 떨려왔다.

 이 같은 모험은 살면서 처음이다. 정국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커다란 눈을 부릅떴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기분에 정국의 가슴속에 잔잔한 흥분이 차올랐다.

 정 가운데에 있는 지프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정국은 참호 안에서 몸을 숙인 채 고개만 조금 빼내어 살폈다.

 “…….”

 뭐지? 군복 차림이 아니다. 홀로 어떠한 무기도 없이 걸어온 남자는 장교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참호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우뚝 선 채로 정국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푹 눌러쓴 정복 모자 밑으로 남자다운 턱 선이 보였다. 정국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의 계급장을 확인했다. 무궁화 하나. 소령. 이상하다. 자신을 데리고 가기 위해 영관급 장교가 직접 나섰다? 게다가 무기도 없이 맨몸에 정복 차림으로 말이다.

 정국은 줄지어 서 있는 지프를 바라보았다. 운전석과 조수석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앉아 있었으나 이상한 움직임은 딱히 없었다. 정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어도 위험한 상황을 만들 것 같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소령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국이 참호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지민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의 옷깃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
 “기다려.”

 그 말을 남기고 정국이 참호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작전장교는 총을 어깨에 멘 채 다가오는 정국을 바라보았다. 엉망으로 더럽혀진 티셔츠와 옆구리의 핏자국. 얼굴 곳곳에 다친 상처와 팔 다리에 보이는 피멍. 제대로 먹지 못해 체지방이 빠져 양 볼이 홀쭉하게 패인 모습. 보이는 곳에는 군살이 없지만 다부진 어깨와 가슴팍. 동그란 눈동자 안에 날카롭게 물들어 있는 경계심과 생의 욕구. 다섯 걸음 가까이 다가온 정국을 확인한 작전장교가 푹 눌러 썼던 정복 모자를 벗었다. 더운 바람이 후욱 불어와 그의 눌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정국아.”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국의 눈이 커졌다.



 작전장교는 계엄사령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자네가 직접 잡아와.’
 ‘…….’
 ‘형이 동생을 마중 나가야 하지 않겠나.’

 모자를 벗은 얼굴은 정국을 많이 닮아 있었다. 못 본 사이 엉망이 된 꼴을 하고 있는 제 동생을 바라본 정호의 눈빛에는 연민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뚜벅뚜벅 제 동생에게로 걸어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보며 바짝 굳어 있는 정국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떨리는 입꼬리를 겨우 감췄다.

 “형? 형이… 왜…….”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정국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정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데리러 왔지.”
 “이게 대체…”
 “정국아, 가자. 살아야지.”

 그 말을 끝으로 정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작은 주사기 바늘이 정국의 허벅지에 콱 박혔다. 정국이 놀라 뒤로 두 걸음 주춤했으나, 이내 빠르게 도는 약기운에 눈앞이 핑 돌았는지 비틀거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것을 정호가 빠르게 붙잡아 당겼다. 정국은 제 형의 가슴팍으로 풀썩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선배!!!!”
 “정국아!!!!”

 주사를 맞고 쓰러진 정국을 보며 진규와 지민이 비명을 질렀다. 지민은 참호에서 벌떡 일어나 눈앞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정국과 많이 닮은 얼굴. 큰 키. 단단한 체격. 각 진 턱선과 뚜렷한 이목구비. 동그란 눈.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눈빛.

 기절한 정국의 몸을 받쳐 안으며 눈을 치켜뜨고 있는 남자의 가슴팍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구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통합 작전장교 전정호.

 그 순간 기억 속에 있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저는… 가족 없어요.’
 ‘어. 나돈데. 형 하나 있는데 직업군인이야.’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지민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jk  | 190531   
비밀댓글입니다
    : 보안코드 이미지 : 보안코드 입력폼 비밀글
목록으로
jack

오늘 하루동안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