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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애 17 랠리 씀

Abel Korzeniowski - Letters

아는 애
17













 오랜 시간 허덕이던 것들을 채우려는 몸부림은 처절했다. 갈증이 가시지 않는 사람들처럼 달라붙어 끝없이 서로를 탐했다. 침대 위에 뒤엉켜 호흡과 체액을 섞는 동안 노을이 졌으며, 어둠이 깔렸고, 비로소 깊은 밤에 다다랐다. 하지만 한 번 열린 욕망의 상자는 닫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닫아본 적 없었다는 듯.

 체력이 다한 지민의 몸이 시트에 늘어져 바르르 떨어댈 때가 되어서야 그들의 행위가 겨우 멈추었다. 정국은 땀으로 흠뻑 젖은 지민의 등을 덮어 누운 채, 애써 끌어 올렸던 열기를 식혀주려 가벼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지민은 귓가에서 들리는 정국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베갯잇에 뭉개진 뺨과 입술에는 단속되지 못하고 흘러나온 침과 얼굴이며 입 안이며 할 것 없이 뿌려졌던 뜨끈한 정액이 묻어 있었다. 정국은 제 흔적이 가득한 지민을 들여다보다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나 느꼈던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였다.

 “힘들어?”

 숨소리가 가득 섞인 정국의 물음에 지민은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입술만 뻐끔거렸다. 정국의 몸에 매달려 신음을 내지르느라 목이 다 쉬어버린 듯했다. 인형처럼 뺨을 대고 누워 눈꺼풀만 껌뻑이는 지민의 모습은 또다시 정국을 목마르게 했다. 하얀 뒷목을 베어 물며 후희를 전해주자 어깨를 움츠리며 반응해오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뒷머리와 조금 길게 자란 윗 머리카락을 차근차근 훑으며 정국은 넘실거리는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몇 번이나 지민을 안으며 사정하는 순간마다, 어쩌면 이 날을 위해 그간 긴 고통을 감내하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결코 그의 육체만을 기다린 것은 아닌데도, 그의 몸 안을 자유롭게 침범하는 순간의 움직임이 영혼까지 죄다 흔들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던가. 하지만 이런 감정 또한 분명히 사랑이었다.

 정국이 몸을 먼저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잠시 뒤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릴 뒤로 하고 정국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침대 밑에 반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지민의 시야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깜빡.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꺼풀 위에 가볍게 키스한 정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같이 씻을래?”

 축 늘어져 있는 지민이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의 몸을 한 품에 들어 안았다. 온몸의 뼈가 물렁물렁해진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지민을 고쳐 안고 천천히 욕실로 향했다. 더운 물이 반쯤 차오른 욕조 안에 조심스럽게 지민을 내려놓았다. 따뜻한 물속에 들어왔지만 지민은 오히려 한기를 느꼈다. 그건 내내 제 몸 안을 꽉 채우던 정국이 빠져나간 자리가 허허했기 때문이다. 몸이 허락해준다면, 더 오래오래 그의 것을 뱃속 깊은 곳까지 밀어 넣어 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아.”
 “응.”
 “그냥 불러봤어. 꿈같아서.”

 지민의 뒤에 앉은 정국이 다리를 쭉 뻗고 욕조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댔다. 타원형 욕조는 두 남자가 들어가 앉아도 공간이 남을 만큼 커다랗다. 정국은 지민의 등을 끌어안고 따뜻한 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지민은 제 얼굴을 어르는 정국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숨을 포옥 내쉬었다.

 “아팠어?”
 “응.”
 “…좋았어?”
 “응.”
 “흐흥.”

 정국은 지민의 젖은 어깨 위에 입술을 대고 아양을 피웠다. 귓가에 가깝게 들리는 귀여운 그의 웃음소리에 지민도 덩달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 좋아?”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했다. 정국은 그 말이 꼭 듣고 싶은 사람처럼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지민의 몸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좋아. 많이….”

 아까부터 계속 이어지던 질문마다 힘겹게 응답만 하던 지민이 적극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목이 쉬었는지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음악처럼 듣기 좋았다. 지민이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그의 입을 통해 그 말이 나오니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정국은 어린 아이처럼 지민의 등을 더 꼬옥 끌어안으며 그의 마른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같이 살고 싶다.”

 뭉근한 온수로 인해 뿌연 김이 들어찼다. 마치 물안개 같은 그 속에서 정국은 귀를 축 내린 강아지처럼 속삭였다. 지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태형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지민이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국과의 기나긴 정사로 잠시 잊었던 얼굴이 머릿속에 죄책감처럼 피어올랐다. 세월의 무게, 그리고 태형이 주는 사랑의 무게. 그것이 지민을 짓눌렀다. 부모님 앞에서 망설임 없이 커밍아웃하려고 했던 태형. 그의 변함없는 애정이 대체 어디까지일지 가늠이 안 됐다.

 “정국아, 나는…….”

 지민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태형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없었듯, 정국에게도 마찬가지다. 너 없는 동안 태형이를 너무 사랑했어. 지금도 태형이를 사랑하고 있어.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정국에게 하염없이 흔들리다가 꽁꽁 숨겨두었던 사랑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고 해서, 태형을 향한 마음이 식거나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을 향한 마음은 저울질을 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알아. 정리해야 할 게 남았다는 거.”

 정국이 조심스레 지민의 몸을 돌려 앉혔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고요하게 욕실 안에 울렸다. 지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잡고 젖은 이마에 키스했다. 입술을 떼어내자 그새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정국은 그의 얼굴을 감싸 잡고 한참이나 어루만졌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너를 보내고 싶지 않아.”
 “…정국아.”
 “단 하루도 안 보낼래.”
 “…….”
 “나랑 살자.”

 지민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겨우 버티고 있던 눈물방울이 뺨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정국은 그가 고개를 숙일 수 없도록 뺨을 붙잡고 쪼아대듯 반복적으로 입을 맞췄다. 발갛게 부푼 그의 아랫입술을 제 위아래 입술 사이로 머금었다가 떼어내고, 다음에는 윗입술을 핥고, 그 다음에는 축축한 혀를 살짝 빨아들였다가 놓아주었다. 입술이 반복적으로 접촉할 때마다 쯔읍, 진득한 소리가 났다.

 정국은 지민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하체에 지민을 올려 앉히고 애무 같은 키스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제 위에 올라타서 높아진 시야에 있는 지민을 보면서 애타게 그의 쇄골과 어깨에 입을 맞췄다.

 “응? 지민아. 가지 마.”
 “하…….”
 “그 남자한테 가지 마….”

 아이처럼 조르는 말투와 달리 표정은 애달팠다. 지민은 다시 제 몸에 닿아오는 정국의 입술을 느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느새 엉덩이 사이에 정국의 것이 묵직하게 비벼졌다. 단단한 것이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정국은 천천히 지민의 벌어져 있는 몸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따뜻한 물 안에서 다시금 하나로 붙는 행위에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정국은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애절한 얼굴을 했다. 그 애타는 모습은 7년이나 외톨이로 산 어린아이 같기도 했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기도 했다.

 “으읏….”
 “지민아. 갈 거야? 응?”
 “아…. 정국아…….”
 “나랑 있을 거라고 말해줘.”
 “아아….”
 “응?”

 순식간에 뜨거워진 분위기에 지민은 천장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달뜬 숨을 토해냈다. 제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애원하는 정국의 소리가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여갔다.

 가면 안 돼. 지민아. 나랑 있어줘…. 너 없으면 나 죽어. 이제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 정국은 끊임없이 애원하며 그의 몸을 더 깊숙이 찾았다. 마주본 채로 다시 이어지는 행위에 지민의 정신마저 노곤하게 풀려갔다. 그 어떤 복잡한 생각도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






 지민이 뛰쳐나간 후 태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 지민을 기다렸지만 어디로 갔는지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그의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태형은 성급했던 자신을 탓하며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저녁이 될 때까지 연락은 닿지 않았다. 한참 고민 끝에 태형은 지민의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다행히 지민이 본가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했다.

 - 그런데 태형아, 지민이랑 심하게 싸웠니?
 
 걱정스레 물어오는 어머니에게 별일 아니라며 안심시켜드리고 겨우 전화를 끊었다. 태형은 지민이 없는 침대에 홀로 덩그러니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흔들리고 있는 지민을 보는 게 불안해서 조급해졌었다. 충동적으로 커밍아웃을 해서라도 그를 제 옆에 두고 싶었다. 만약 그가 여자였다면 진작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기에, 태형은 지민과 자신이 떨어지지 않게 꽁꽁 묶어놓을 수 있는 실 한 줄이라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민이 버럭 화를 낸 것이 정국 때문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는 좌절감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꿋꿋이 버티며 지민을 붙잡으려 했다. 마음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다.

 태형은 깊은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얼굴로 겨우 출근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퇴근한 지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간 연애를 하며 사소한 말다툼은 있었어도 그가 집을 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최근 둘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지민은 감정이 홧홧하게 익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달아난 거니까, 진정되고 나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뮤지컬 연습시연 영상을 찍는 날이었다.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영 못마땅했다. 태형이 표정을 굳힌 채로 연습실에 들어섰다. 카메라 여러 대와 몇몇 기자들이 와 있었다. 인터넷에 공개되는 연습시연 영상인 만큼 문제없이 준비가 되어야 했다. 특히 주연으로 더블캐스팅 된 정국으로 인해 뮤지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남달랐기에,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태형 씨, 오늘 시연 배우 바뀐 것 들었지?”
 “예?”
 “전달 못 받았어? 정국 씨 스케줄 때문에 조정됐어. 오늘은 김한결로 가는 걸로. 아마 전한결은 주말 지나고 촬영할 거야.”

 김한결과 전한결은 주인공 ‘한결’ 역을 맡은 두 주연 배우의 성을 따 붙인 별칭이었다.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며칠 뒤에는 다시 마주칠 얼굴이다. 태형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훅 내쉬었다. 지민이 점점 흔들려갈수록 정국의 얼굴을 보는 게 괴로웠다. 만약 정국이 지민에게 나쁜 놈으로 기억되는 옛 애인이었다면 오히려 신경 쓰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다는 건 태형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두 사람이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 이유가 뭔지. 이렇게 불안한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 것에 대해 지민과 정국,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연습시연 촬영 후 평소보다 세 시간 일찍 퇴근했다. 태형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태형은 급하게 차를 몰아 지민의 본가로 향했다. 다툰 것 같은 이 상황을 얼른 해결하고 싶었다. 평소 지민은 화가 나더라도 오래 담아두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다시 한번 사과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민이가 집에 안 갔다고?”
 “…예?”
 “어제 오후에 전화 받고 급하게 나가길래, 난 또 태형이 너랑 화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집에 안 들어왔단 말이야?”

 지민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이었다. 본가에서 지냈을 거라는 생각이 와장창 무너졌다. 그 순간 태형의 머릿속엔 정국이 떠올랐다. 전화를 받고 급하게 나가서는 들어오지 않는 지민. 갑자기 스케줄을 조정하는 바람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정국. 불쾌한 예감이 태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민이 출근 어떻게 했지? 어제 입은 옷은 출근복장이 영 아니던데? 얜 대체 어딜 간 거야?”

 어머니가 물음표를 가득 달고 궁금해 했다. 태형은 애써 웃으며 어머니를 안정시킨 후 집을 빠져나왔다. 혹시 회사도 결근한 걸까. 설마. 태형은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핸들을 꽉 붙잡은 채 지민의 회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회사의 정문을 바라보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하나둘씩 건물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들뜬 금요일 밤의 분위기. 삼삼오오 무리지어 걸어 나오는 회사원들을 속에서 지민을 찾으려 애썼다. 태형은 차에서 내려 그의 회사 출입구로 걸어갔다. 다시 그곳에서 한 시간쯤 기다렸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 로비는 텅 비었고, 심지어 빌딩 곳곳에 불이 꺼졌다. 태형은 멍하게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결근까지 한 거야?

 왜? 물음표를 띄워봤으나 떠오르는 답은 단 하나였다. 전정국. 둘이 하룻밤을 보내고 지금까지 같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태형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시금 지민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전원은 꺼져 있었다. 제발, 전원 좀 켜. 전화 받아 지민아. 태형은 중얼거리며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술이 들어가니 태형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소주 한 병을 홀로 비우고 식탁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생각의 늪을 키워가다 보니 지민이 정국에게 갔을 거라는 확신도 또렷해졌다. 지민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모른 체하려고 했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지민이 정말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치겠어. 나는 너를 못 놓겠는데.

 “지민아…….”

 나 어떻게 살라고 이래.





*






 주말이 될 때까지 지민은 정국과 함께 했다. 다음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꽉 닫은 채로 억지로 도피해보려고 했다. 현실적이고 정상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다. 무작정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질러놓고 나니 자포자기 심정이 된 것이다. 아마 살면서 해본 가장 어리석고 못된 짓이 아닐까. 깊이 생각하려 들면 죄책감이 무섭게 덮쳐왔다. 그게 너무 두려워서 억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정국의 집에 머무른 지 나흘째. 그리움을 해갈할 수 없었던 7년을 채워가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그간 못 했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7년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지민은 정국의 입을 통해서 아주 오래 지난 진실들을 들었다.

 “내 스캔들 기사를 낸 건 우리 회사였어.”

 지민은 정국이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뜬금없이 터졌던 여자 아이돌과의 스캔들을 떠올렸다. 정국은 그때의 이야기부터 차분하게 털어놓았다. 무서웠다고. 이런 기사 하나쯤 내는 건 쉽다는 걸 보여준 거였으니까. 당시 정국은 회사에게서 버림을 받는 게 무서웠다. 그보다 더한 것들로 완전히 망가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혹시 지민에게도 피해가 갈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때 그냥 뛰쳐나올걸 그랬어. 너무 어렸었나 봐. 무서웠어. 가끔 꿈을 꿨거든. 회사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내 멋대로 너를 만나러 가는 꿈. 그러면 꼭 마지막에 네가 누군가에게 돌을 맞는 장면으로 꿈에서 깨어났어.”

 정국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만약 막무가내로 밀고 나갔더라면 지민을 빼앗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겁 대가리 없는 놈이라고 찍혀서 성공가도에 오르지도 못하고 미끄러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돈, 유명세, 그런 것들은 지나고 나니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정작 좋은 것들을 함께 누릴 한 사람이 없었으니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무리 후회해도 바뀌는 건 없더라. 네가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알게 됐을 때, 그때라도 뛰쳐나올걸. 가수 같은 거 애초에 하지 말걸. 일이 잘 돼도 행복하지 않았어. 몇 번이나 널 찾아갈까 했는데, 문득 무서워지더라고. 네가 아이돌 전정국을 지긋지긋해 할까 봐.”
 “…….”
 “혹시 네가 나를 다 잊었을까 봐.”
 “…….”
 “그럼 나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어.”
 “나도 후회했어, 정국아. 그때 내 욕심을 좀 더 부려볼걸.”
 “…….”
 “그냥 나를 데리고 도망가라고 말해볼걸. 아니면… 헤어진 척이라도 하자고 할걸. 아주 조금만 서로 없이 버티다가 몰래 다시 만나자고 할걸.”
 “바보. 나는 네 말대로 했을 거야.”
 “그런데 내가 네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 같았어. 너무 사랑하니까 보내준다는 말이 노래 가사에만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러고 있더라.”
   
 아무리 속 안의 깊은 곳까지 털어놓아도 오랜 시간 곪았던 감정은 쉽게 낫지 않았다. 정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금세 눈물을 흘렸다.

 “정국이는 여전히 눈물이 많네.”
 “박지민 말고는 울 일 없어….”

 지민은 정국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을 7년을 알기에, 앞으로 더는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득 들어찼다. 절대로 서로 후회하는 일이 없게.



 만지지 못했던 갈증은 쉴 새 없는 잠자리로 대신했다. 커다란 정국의 아파트 안에서 지민의 몸이 닿은 가구라고는 침대와 소파, 식탁뿐이었다. 끼니때가 되면 정국의 매니저가 이런 저런 음식을 챙겨 왔고, 식사 후 소파 카우치에 누워서 몸을 끌어안고 함께 TV나 영화를 봤다. 그동안 혹시나 정국을 발견할까 봐 TV를 잘 보지 않았던 지민은,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화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이내 불붙듯이 뜨거워지는 서로의 몸에 욕정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국의 밑에서 그의 몸에 다리를 감으며 안겼다. 계속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들처럼. 더, 더, 비어 있던 그 많은 시절을 채울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있는 나흘 동안 정국은 점점 더 지민의 앞에서 활기를 찾아갔다. 정국은 끊임없이 속삭여주었다. 지민아, 너 여전히 예뻐. 하나도 안 변했어. 우린 여전히 그때와 같아. 앞으로도 같을 거야.



 지민은 이 달콤한 순간이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나쁜 짓이 아닐까 생각했다. 태형을 떠올리면 죄책감이 무섭게 자신을 덮쳐 왔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계속 남겨둔다면 이 달콤한 꿈도 언젠가는 깨어나서 멀리 달아나버릴 것 같았다. 계속 도피하면 할수록 태형을 더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을 태형에게 하는 날이 올까?





*






 지민은 조심스럽게 집 현관문을 열었다. 조금 이르게 출근하는 태형이 없을 시간이었다. 며칠 갑작스러운 연차를 내고 정국의 집에 머무르다가 닷새 만에 들어오는 집이었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집 앞 길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닷새였다. 아무리 다퉜다고 하더라도, 화가 났다는 이유로 이해해줄 수 있는 선은 넘어버렸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정국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바로 제정신이 돌아왔더라면 골든타임은 넘지 않았을 테지. 이제는 적당한 변명을 둘러대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현관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숨죽여 신발을 벗는 동안에도 지민은 지금 자신의 태도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형에 대한 죄책감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커서,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그에게서 달아나는 첫 발걸음은 계속해서 자신을 질질 끌고 갔다. 숨을 쉬고 싶었다. 만약 그때 태형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공황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너 이러는 거 전정국 때문이야? 그래?’

 그의 말이 지금 당장 하나를 선택하라는 종용처럼 들렸다. 그때의 태형의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 지민아, 너 지금 전정국한테 흔들리고 있지?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들키는 것도, 당장 두 사람 중 하나에게 상처를 줘야한다는 것도, 지민에겐 버거울 뿐이다.

 “어…….”

 거실에 들어선 지민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 안에 없을 줄 알았던 태형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태형의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멍하게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닷새 사이 태형은 메마른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지민은 태형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가슴통증을 느꼈다.

 “왔어?”

 태형이 다정하게 물었다. 목소리 끝은 조금의 물기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바싹 메말라서 쩍쩍 갈라졌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지민을 향해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지민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태형을 바라봤다.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오랜만에 본가 가니까 편했나 보네.”
 “…….”
 “원래 엄마 밥이 최고잖아.”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다가왔다. 지민은 얼어붙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거실 슬리퍼를 끌며 다가온 태형이 가까이서 지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지민은 차마 눈을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급하게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래도 전화 한 통 해주지. 걱정했잖아.”
 “…….”

 태형은 수척해보였지만 말투만큼은 덤덤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지민은 알 수 있다. 아마 태형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본가에 갔다는 사실을 아는 걸 보니 어머니와 통화를 했을 테고, 그러다 보면 본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달려 나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연락이 되지 않는 자신을 찾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태형이 아니다.

 “지민아.”
 “…….”
 “내가 미안했어. 이제 화 조금 풀렸어?”

 지민은 그 말에 눈꺼풀을 내리고 파르르 떨었다.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태형의 손길이 마치 가시처럼 마구 피부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건 지민이 스스로를 한없이 파괴해가며 자책했기 때문이다. 태형에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태형아….”
 “응?”
 “내가… 그… 있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온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실수, 혹은 치명적인 잘못을 모르는 척해주고 있는 연인. 지민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 정도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태형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내, 내가… 실은…”
 “지민아, 우리 휴가내고 여행 다녀올래?”

 태형이 지민의 말을 끊고 물어왔다. 지민은 바들바들 떨며 태형에게 하려던 말을 멈췄다. 사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나오는 대로 두서없이 주절주절, 무슨 말이라도 하다 보면 갈피를 잡을 수 있을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 그렇기에 뜻밖의 태형의 말에 놀라 눈을 껌뻑였다.

 “곧 뮤지컬 티켓 오픈하고, 다음 달부터 공연 들어가거든. 음, 사실 그때까지는 바쁜데 내가 조정해볼게.”
 “…태형아.”
 “내가 너 마음 아프게 한 것 같아서 속상해서 그래.”

 아니야, 널 아프게 한 건 나야.

 지민은 울분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이었다. 여상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는 태형의 온도가 너무 따스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따뜻한 온도에 저온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이 자리에서 태워 없애버린다 해도 사실 할 말은 없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해외 한 번도 못 갔잖아.”

 태형이 지민을 깊게 포옹하며 나른하게 말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지민은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숨기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뺨을 가져다 댔다. 어깨와 팔에 잔뜩 힘을 주고는 어깻죽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응? 싫어?”
 “…아냐, 좋아.”
 “진짜지?”
 “으응….”

 지민의 대답에 태형이 그를 더 세게 품으로 당겨 안았다. 지민은 귓가에 울리는 그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정적인 속도로 뛰던 심장이, 지민이 자기도 모르게 훌쩍인 순간부터 둥둥둥 점점 빠르게 소리내기 시작했다. 지민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뺨으로 뚝뚝 흘려보냈다. 그 바람에 태형이 입고 있는 얇은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어갔지만, 그는 우는 것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저 지민을 끌어안고 머리와 목,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줄 뿐이었다.

 그런 태형의 품에서 지민은 이별을 예감했다.












(+) 아는 애 18화부터는 완결까지 써놓고 한꺼번에 올릴 예정입니다. 이틀 간격으로!!!

파이리  | 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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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니미니  | 190513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가서 연락도 없이 며칠째 안오는걸 집에서 기다릴수밖에 없는 저 심정응 정말 상상도 안돼요...ㅠㅠ
국민이나라  | 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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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ny1013  | 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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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하하  | 191009   
어뜩하나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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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조교  | 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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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방팬  | 191216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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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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