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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애 20 랠리 씀

visions of gideon instrumental

아는 애
20













 며칠간 연락이 되지 않는 지민 때문에 정국은 딱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릴까 봐 겁이 났다. 7년 만에 찾아온 차가운 재회도, 참아왔던 것들을 폭포수처럼 터뜨렸던 뜨거운 밤도, 사실은 다 없었던 일은 아닐까 싶었다. 지민을 그리워하며 차곡차곡 채웠던 독이 한 순간에 바스러진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바보 같게도 지민을 되찾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지내왔으니까.

 한참 애태우던 지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정국은 그 짧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기다리겠다는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 치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 정국아, 할 말 있어. 내일 모레 만나자. ]

 그 할 말이란 게 무엇일까.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머릿속은 새까맣게 물들었다. 제 곁을 영영 떠나겠다는 말이라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만약 자신이 겁내고 있는 말을 지민이 한다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무르고 말 것이다. 지민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스무 살, 지민이 다른 남자와 집 앞을 걷던 모습을 보며 자존심이 무너졌던 순간의 행동을 몇 년이나 후회했으니까. 자존심 그깟 게 뭐라고. 그때 그를 뒤로하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조금의 시간 낭비도 하지 않았을 텐데.

 끔찍한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정국의 앞에는 지민이 앉아 있었다. 그동안 무얼 하며 지냈는지, 전보다 더 핼쑥한 모습이었다.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술 있어?”

 지민은 소파에 앉자마자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국의 눈 밑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쏟아질지 몰라서 잔뜩 겁먹은 채로 바짝 굳었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입장이었다. 정국은 주저앉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집에 있는 것이라고는 절반 정도 비워진 위스키뿐이었다. 아이스버킷에 얼음을 담고 언더락 잔 두 개를 챙겼다.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유리잔에 얼음을 담아주려는 순간, 지민이 위스키 병을 낚아채고는 황금빛 액체를 콸콸 따랐다.

 “…….”

 정국이 말릴 새도 없이 지민은 언더락에 가득 따른 위스키를 꿀꺽꿀꺽 넘겼다. 목마른 사람처럼 금세 한 잔을 비워버린 지민은 목이 타들어가는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음했다.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버킷 안에 담긴 얼음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까드득 소리를 내며 씹어 없앤 지민의 태도는 무언가에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지민이 다시 술병을 들어 제 잔에 따르려는 것을 이번에는 정국이 막았다.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고는 얼음과 함께 잔을 채웠다.

 “…그렇게 마시면 속 버려.”

 생각해 보니 지민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렸던 두 사람이 어른이 되기까지 공유한 시간은 세월에 비해 한 없이 짧았다. 지민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격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곁엔 어떤 친구가 있는지, 술버릇은 어떤지, 지금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정국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급하게 술을 들이켜야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영영 지민의 입이 열리지 않길 바랐다. 차라리 이도 저도 아닌 지금 상태라도 좋으니 만날 수만 있게 해달라고 말할까. 곁을 떠나겠다는 말만 하지 말아달라고. 더 욕심내지 않을 테니, 온전히 내 것이 아니어도 좋으니, 너를 볼 수만 있게 해달라고 빌까.

 “떠나려고 했어.”

 두 번째 언더락을 비운 지민이 한숨처럼 말했다.

 “너도 태형이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떠나려고 했어.”
 “…….”

 그 끔찍한 말에 정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회사도 그만두려고 했어.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은 다 끊어버리고 불행해지려고 했어.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주고 싶지 않은데, 결국 상처를 줄 수밖에 없잖아.”
 “지민아….”
 “정국아, 나는 너를 사랑해.”

 그 말을 하는 지민의 눈은 울고 있었다.

 “너를… 정말로 사랑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너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어. 네 얼굴을 보면 아플 것 같아서 TV도 못 켰어. 네 목소리 들으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음악도 못 틀었어.”
 “하…….”
 “술에 취하면 네가 생각났어. 죽고 싶은 적도 있었어.”
 “…….”
 “어려웠어. 너랑 헤어지고 나서 죽은 사람처럼 지냈어. 네가 울던 모습이 떠올라서 밥도 안 넘어갔어. 엉망진창으로… 그렇게 살다가 그냥 죽고 싶었어.”

 지민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정국이 겪었던 것과 같았다. 이별은 삶을 버리고 싶을 만큼 아프게 했다.

 “그런 나를… 치유해준 게 태형이야.”
 “…….”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아졌어. 태형이가 날 그렇게 만들어 줬어. 그래서 나는… 정말로… 힘들어 정국아. 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지민아.”

 정국은 잠긴 목소리를 겨우 냈다. 예상하고 있던 것들을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 떠나버리겠다고? 너도 아프겠다고? 여태 그렇게 아팠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겠다고?

 “사랑이 너무 어려워. 정국아….”

 지민의 얼굴이 흠뻑 젖었다.

 “나 바보라서…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어서…….”

 정국은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지민을 향해 고개를 세차게 내젓고 싶었다. 아니라고 말해. 다시 헤어지자는 말이 아니라고 말해줘. 절대 그런 말은 아니라고 해줘.

 지민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정국은 제 발 밑에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이 믿기지 않아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정국의 무릎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묻었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정국의 다리를 뜨겁게 적셨다. 정국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런데 태형이가… 흐윽… 헤어지자고 했어. 흑, 다 눈치 채고… 나보고 행복하라고 했어. 으윽, 나 어떻게 해… 정국아, 나… 나 어떻게 해. 마음이, 마음이… 너무 아파. 미안해… 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흐으….”

 정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죽여 울었다. 지민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기마저 슬픔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지민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길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여정인 줄은 미처 몰랐다. 너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고 욕심을 부리면, 이제 내 곁에서 한 시도 떠나지 말라고 고집을 부리면, 물 흐르듯 그렇게 될 줄로만 알았다. 지민의 삶에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을 거라고는,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지민의 심정이 가늠도 되지 않아 넋이 나가버릴 것만 같다. 그의 울음소리에 맞춰서 정국의 흐느낌도 점점 짙어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자그마한 눈물샘에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걸까.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정국은 숨 쉬는 것도 까먹고 소파 위에 널브러져 울었다. 제 다리를 붙잡은 지민의 체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이러다가 녹아서 없어져버리진 않을까 걱정될 만큼.



 강제로 차단시켜 캄캄했던 시야가 천천히 열렸다. 천근만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제 무릎 위에 늘어진 지민의 머리통을 매만졌다. 아직 지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한 모든 말은 과거형이었다. 떠나려고 했다고. 그만두려 했다고. 불행해지려 했다고.

 이윽고 빨갛게 충혈 된 지민의 눈동자가 정국을 빨아들였다. 늘어져 있던 몸을 세워 고개를 든 지민이 정국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춰왔다. 정국은 끌려가는 동안 그의 가벼운 몸을 잡아 일으키며 품에 안았다. 어느새 정국의 다리 위에 내려앉은 지민이 차근차근 정국에게 입술을 비볐다. 그 감촉을 느끼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정국은 지민이 하는 대로 따라가며 가만히 그의 허리를 감쌌다.

 조심스럽고 위태롭던 입맞춤이 끝나자 지민의 젖은 입술이 정국의 이마로 향했다. 짧은 순간 따뜻하게 접촉했다가 떨어지며 여운을 남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치열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을 줄래?”
 “…….”
 “아니, 아니다. 기다려달란 말은 안 할게. 네가 언제라도 날 아프게 하고 싶으면 그래도 돼.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괘씸하고 미우면… 버려도 돼.”
 “…이 세상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정국아….”
 “기다리면, 돌아올 거야?”
 “…….”
 “몇 년이라도 더 기다릴 수 있어. 7년… 기다렸으니까… 못할 것도 없어. 네가 완전히 내게 와주기만 한다면.”
 “흐으….”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기다릴게. 말만 해. 너 기다리다가 늙어서 추해지길 바라면 그렇게 해줄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잘 살길 바라면 그렇게 할게. 어렵겠지만.”

 지민은 정국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뜨겁게 달궈진 목덜미에 젖은 뺨을 비볐다. 의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정국의 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지민은 이 여린 남자를 품에 가득 안은 채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정국아.”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돌아오겠다고 말해.”
 “…돌아올게.”
 “그래. 그럼 됐다.”
 “꼭 돌아올게.”
 “응. 기다릴게.”
 “대신 행복하게 있어.”
 “응…. 노력해볼게.”

 정국은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마른 몸을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얼마만큼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모든 호흡의 분초를 잘게 나눠 지민의 향으로 가득 채웠다. 꾸역꾸역 그것을 기억의 창고 안에 모아 담았다. 원할 때면 언제든 향기를 꺼내어 흠뻑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옅어지지 않을 만큼 숱하게.





*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달’이라는 시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지민은 매 순간 태형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태형을 가장 사랑했을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렸다. 시간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스물여섯, 서로에게 가득 물들었던 작년. 나란히 대학을 졸업했을 때, 학사모를 쓰고 허연 입김과 함께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로에게 무척 익숙해졌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을 준비한답시고 공부를 하다가 책상에 엎어져서 잠들 때가 많았는데, 꼭 눈을 뜨면 지민은 태형의 품 안에서 따스하게 안겨 있었다. 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불러주는 자장가가 듣기 좋아서 일부러 더 꿈틀거리며 애교를 부리곤 했다.

 “태태, 나 오늘 커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잠 안 와?”
 “응. 자장가 불러줘.”

 지민은 태형의 품을 파고들었다. 퇴근 후 녹초가 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엉겨 붙었다. 지민은 태형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이번 달 우리 팀 야근 레이스래….” 볼멘소리를 하자 태형이 부스스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여행에서 이별을 말하며 울고불고 했던 것을 잊은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지민은 그에게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썼다. 태형이 귓가에 대고 불러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눈물이 왈칵 흘러내릴 것 같아서 눈을 꽉 감았다. 커다란 그의 손이 등을 천천히 보듬어주었다.

 “자?”
 “아니. 한 곡 더.”
 “푸흐.”

 태형은 지민의 요구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곤 다시 자장가를 불렀다. 이 순간은 가면극과는 달라야 했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묻어두는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태형은 자기 자신의 불행보다 지민의 불행을 더욱 걱정했다. 반드시 행복하라고 했다. 불행하면 자신이 죽을 거라고 했다. 지민은 그 마음의 크기가 벅찼으나, 그게 태형의 뜻이라면 눈물을 머금고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스물다섯, 마지막 학년을 여유롭게 보내며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영화, 뮤지컬, 연극, 전시회. 희한할 정도로 취향이 비슷해서 여기저기 쏘다니며 모든 시간을 공유했다. 대낮부터 밤까지 밖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오면, 함께 샤워를 하다가도 불이 붙어서 금세 뜨거워지곤 했다. TV를 보는 것만 빼고는 거의 모든 것을 태형과 함께 했다. 옷 입는 스타일이 비슷해져서 커플룩처럼 입고 다녔는데, 나중에 가서는 정말로 대담해지는 바람에 똑같은 커플 티를 맞춰 입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덕분에 평소 CC라고 놀리던 동기와 후배들 틈에서 곤욕을 겪어야 했다.

 주말이 되어 오랜만에 대학로로 향했다. 대학시절 참 많이도 밟았던 곳이었다. 청춘이 가득 담긴 그 거리를 걸으며 정처 없이 데이트했다. 골목에 있는 작은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공연을 홍보하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소극장으로 향했다. 운 좋게 시간이 맞는 연극을 발견했고, 2시간 반 내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공연을 관람했다.

 “우리 오랜만에 라이브 카페 갈까?”
 “맞아, 나 거기 맥주 좋아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가게에 들어가 즐기던 수제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세 잔쯤 마셨을 때, 기분 좋게 오르는 취기와 흥을 돋우는 재즈 라이브에 흠뻑 빠져 충동적으로 칵테일을 주문했다. 예전부터 항상 마시던 대로였다. 술에 약한 태형은 달달한 준벅, 술을 좋아하는 지민은 블랙러시안. 두 사람은 분위기에 취해 흥얼거리다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딱히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함께 욕조에 몸을 담갔다. 향이 좋은 입욕제를 풀어 넣은 물은 두 남자가 들어가자 욕조 밖으로 흘러넘쳤다. 좁은 욕조 안에서 바짝 붙은 채 나른하게 몸을 풀다가 자연스럽게 시동을 걸었다. 온기에 붉게 달아오른 피부와 흐물흐물해진 살성. 몸의 접촉은 금세 불을 당겼고 태형과 지민은 뿌연 김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지민은 태형의 몸 위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끊임없이 키스를 요구했다.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입을 맞추며 절정에 다다랐다. 이가 따닥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혀를 섞으면서도 태형은 지민을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아마 침실에서도 긴 밤이 계속 이어질 터였다.



 스물넷, 제대 후 복학하기 전까지 몇 달 동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군에 있을 때 참아왔던 것을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사람들처럼 눈만 마주치면 몸을 붙였다. 연애를 시작했을 때보다 더 뜨거웠다. 온종일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서로의 몸을 탐했다. 섹스에 중독되는 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동안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복학 후에도 얼마간은 뭐 마려운 강아지들처럼 호시탐탐 스킨십할 기회를 노리곤 했다. 그리고 그때쯤이었나, 태형이 말했다. 사랑에 확신이 든다고. 아마 그를 충만하게 사랑했나 보다.

 또 다른 주말에는 이틀 연속 집에만 붙어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었다. 주방에서 끼니를 준비하다가도 달려드는 태형을 받아주었고, 거실에 플레이스테이션을 연결해놓고 게임을 하다가도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가슴팍에 기대어 쉬다가 불이 붙었다.

 “아, 콘돔 다 썼다.”

 기어코 사두었던 콘돔 한 통을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에 다 써버리고 나서야 지민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많이 했다고?”
 “엉.”
 “미쳤나봐. 짐승이야?”
 “한통 더 사올까?”

 주섬주섬 속옷을 입으려는 태형을 막아내고 다짜고짜 올라탔다.

 “와, 지민아. 옛날 생각난다.”
 “어떤 거?”
 “학교 화장실에서 막 너 발정나서…”
 “야, 내가 언제!”

 지민은 태형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빨개진 얼굴은 그때의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모습에 태형은 와하하 웃으며 지민의 몸 안에 쑥 찾아들었다. 그 순간 야하게 구겨지는 지민의 표정은 태형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이런 표정 짓는데, 어떻게 짐승이 안 되냐?”



 스물둘에서 스물셋, 부대 안에서 가끔 마주치면 어찌나 반갑던지. 내무반이 가까워서 가끔 얼차려를 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몰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함께 불침번을 서면서 몰래 연애질을 하며 설레기도 했다. 휴가를 받아 나오면 한 맺힌 놈들처럼 붙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게 연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 이상했다. 질릴 법도 한데 절대로 질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흘러가는 시간만큼 풍족하게 붙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애타게 만들었다. 사랑과 열정. 그 두 감정이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민의 끔찍한 야근 주간이 시작되었다. 새 음료 개발 때문에 끊임없는 회의와 PT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지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음료를 시음하며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회사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잡다한 일이 많아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바람에 점심시간 때 외에는 태형의 연락에 답장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면 좀비처럼 겨우 씻자마자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 자기 맨날 기절해서 나 독수공방ㅠㅠ ]

 태형의 볼멘 메시지를 확인한 지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절할 때까지 섹스를 해놓고 독수공방 타령인 게 웃겼다. 점심을 먹다말고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답장을 적었다.

 [ 그럼 오늘 나 데리러 오던가. ]
 [ 데리러 가면 뭐가 달라지나? ]
 [ 기절하기 전에 잡아먹어봐~ ]
 [ 어떻게? ]
 [ 에이 모르는 척하긴… ]
 [ 헉 ㅇㅋ ]

 그리고 그날 밤 녹초가 되어 회전문을 열고 나오자 태형이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늦봄과 초여름의 과도기. 부쩍 더워진 날씨에 야밤에도 더운 바람이 불었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묘하게 야한 표정을 짓는 태형 때문에 지민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차를 타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사방이 컴컴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뒷좌석으로 다급하게 넘어갔다.

 태형은 시트 위에 엎드려 있는 지민의 흰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허리를 바삐 흔들었다. 넓지 않은 뒷좌석에서 상체를 잔뜩 숙여가며 불편하게 움직여야 했지만, 차 안에서 이런 적은 살면서 손에 꼽았기에 흥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 더 빨리 사정하는 바람에 지민이 깔깔거리고 웃는 게, 꼭 군 휴가를 받고나와 급하게 여관방에서 뒹굴던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김태형, 나 야근한 지 닷새밖에 안 됐거든?”
 “미쳐. 닷새나 못했잖아. 약간 흥분해서 그래.”
 “웃겨 죽겠어. 핑계는.”
 “한 번 더 하면 되겠다. 그치.”

 다시 엉겨 붙는 태형을 떼어내느라 지민은 잠시 애먹었다. 짧은 정사에도 입고 있던 셔츠가 땀에 흠뻑 젖을 만큼 흥분한 건 사실 지민도 마찬가지였다.



 스물하나,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늘어간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통하는 것도, 반대인 부분도 전부 흥미로웠다. 연애 1주년이 되던 날은 자축파티를 하자며 요리를 하다가 냄비를 새카맣게 태워먹었다. 그것마저도 즐거워서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결국 배달음식을 먹으며 술에 잔뜩 취해버리는 바람에 무드는 손톱만큼도 없이 흘러가버렸지만, 그건 두고두고 즐거운 추억거리였다. 어떤 때는 자전거 두 개를 빌려서 자전거 여행 스탬프를 찍는다며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결국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똑같이 힘든 주제에, 태형은 지민을 등에 업고 자전거 두 개를 질질 끌었다. 지민은 그때 생각했다. 태형은 자신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도 그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지민아, 난 네가 등산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나도 내가 등산 좋아하는 줄 오늘 알았어.”

 두 사람은 연차 날짜를 맞춰 받아내고는 함께 청계산에 올랐다. 함께 등산을 간 건 처음이었다. 안 해본 것을 해볼까 하여 검색하다 보니 뜬금없이 등산이 눈에 들어왔고, 오늘 등산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등산복도 구입했다. 지민이 등산모자까지 사려는 것을 태형이 가까스로 막았다. 너무 아저씨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맞춰 입고 산에 올랐다. 등산 초보자들 주제에 겉모습만 삐까뻔쩍했다.

 “나 물! 물!”

 몇 백 미터 가지도 못하고 지민은 헥헥거리며 물을 찾았다. 정상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챙겨온 물이 반 이상 동났다.

 “우리 약간… 망한 것 같은데.”
 “헉, 등산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지민아. 너 등산 좋아한다며.”
 “사진으로 봤을 땐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지민의 대꾸에 태형은 큭큭 웃었다.

 “태형아…. 우리 내려갈까?”
 “3분의 1도 안 왔는데?”
 “아…….”

 벌써 얼굴에 시뻘겋게 열이 올라서 헉헉거리는 저질체력 지민 때문에 태형은 웃음을 참아야했다. 결국 이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야 했다. 그 동안에도 지민은 계속 다리가 풀린다며 엄살을 피웠다.

 “오랜만에 업어줄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것 같은데.”
 “다리 부상당한 척해.”

 태형은 불쑥 지민의 앞에 섰다가 몸을 낮췄다. 지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너른 등판에 올라탔다. 지민은 백 팩 두 개를 양 팔에 낀 채로 태형의 목을 감싸 안았다.

 “역시 우리 태태는 나 업어주는 걸 좋아하네.”
 “나밖에 없지?”
 “응.”
 “어째 옛날보다 더 가벼워진 것 같다.”

 내리막을 걸으며 태형은 지민을 한 번 더 고쳐 업었다. 지민은 그의 뒷목에 뺨을 기대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상쾌한 산 공기가 폐 안에 가득 들어찼다가 나가는 느낌이 제법 괜찮았다. 업혀 있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 맛에 등산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업혀서 다니니까 등산도 할 만하네.”
 “진짜 이 세상에서 박지민만 할 수 있는 말이네.”
 “네가 날 잘못 길들였어. 누가 툭하면 업어주래?”
 “네에. 제 잘못이죠. 한 숨 주무세요.”
 “좀 피곤하긴 하네.”

 한 것도 없이 벌써 피로를 느낀 지민이 눈을 느리게 꿈뻑거렸다. 태형의 등판에 매달린 채 규칙적으로 흔들리자 마치 요람에 누워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몽롱해졌다.

 “막걸리집 앞에서 깨워줄게.”
 “오? 김태형 역시.”
 “파전에 막걸리 먹으려고 등산가자고 한 거 다 알아.”
 “나에 대해 너무 파악했네. 죽어줘야겠어. 피슉.”

 검지와 중지로 태형의 관자놀이에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지민이었다.



 스물, 아팠던 여름을 지나 추운 겨울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안았다. 태형과 처음 잠자리를 했던 날 엉엉 울며 알 수 없는 감정에 취했다. 사랑의 시작이었을까. 비뚤게 시작했지만 마음을 키워가는 과정은 결코 서툴지 않았다. 태형은 지민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춰주었다. 그의 연애스타일이 원래 그렇지 않다는 건 나중에 가서 알았다. 그 해의 마지막 날,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리다가 지민은 처음으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태형아, 사랑해.’ 짧은 문장이 끝난 순간 종이 울렸고, 태형은 버튼이 눌린 눈물인형처럼 엉엉 울었다.

 태형이 깊이 잠든 새벽, 지민은 조용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다. 간이조명을 켜놓고 아일랜드 테이블에 앉아 한참 동안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막상 그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지민은 턱을 괴며 고민하다가 천천히 글자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연애 초반에 써본 이후로 처음 쓰는 편지였다.

 Dear. 태형

 그의 이름을 적고나자 다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함께 산 세월이 오래였기에 따로 편지를 쓸 정도의 할 말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왜 편지가 쓰고 싶어졌을까.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이런 편지가 그를 더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수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는 한 달이 되어야 했기에, 뭐든 마음이 가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후회가 남는 건 싫기 때문이다.


 태형아.
 얼마 만에 쓰는 편지인지 모르겠다.
 스물부터 스물일곱까지, 우리 진짜 오래 됐구나.

 내가 너를 가장 사랑했던 때가 언제일까 고민했어.
 근데 꼽을 수가 없더라.
 너는 내게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알려줬어.
 우리 추억은 다 세어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 모든 순간에 새겨져 있는 내 기억은 하나야.
 꽉 찬 행복이었다는 거.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이젠 나 행복한 거 보고 싶다고.
 바보야….
 나는 네 옆에서 정말로 행복했어.

 그래서 더 미안해.
 이 말로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해.
 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근데 태형아.
 이런 말 염치없고 나쁜 거 아는데…
 안 하면 죽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기적인 놈 될게.


 사랑해.
 정말로 사랑했어.
 태형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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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bts  | 190508  삭제
누굴 미워할수도 없는 ㅜㅜㅜㅜㅜ
태형아 나도 사랑해. 누구보다 밝고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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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둥이  | 190508   
셋 다 행복할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ㅜㅜㅜㅜㅜ 부디 태형이가 많이 아파하지 않기를 ㅜㅜㅜㅜ 정말 셋 다 넘 안쓰러워요 ㅜㅜㅜ
져니  | 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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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gen 66  | 190508  삭제
ㅠㅜ 너무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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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omi97  | 190509  삭제
전 오늘도 웁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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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네요. 눈물나게 슬프겠지만 울면서 웃을 수 있는 21편 기다립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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