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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애 8 랠리 씀

아는 애
8












 


 김태형과 연애를 시작한 것 같다.

 그와 잠자리를 하진 않았지만, 사귄다는 말은 유효했던 모양이다. 김태형은 바다 여행 내내 나를 끔찍이도 챙겼다. 내게 하는 행동들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녀석이 원래 다정한 성격이긴 하지만 바다 여행 내내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고, 머리가 헝클어지면 만져주거나, 음식점에서 나를 향해 메뉴판을 돌려주는 그런 행동들을 했다. 밖에 돌아다니는 동안 내 가방을 대신 들고 손을 잡아오는 모습은 영락없는 남자친구의 그것이었다. 나는 김태형이 그간 사귀었던 여자들과 어떤 연애를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평범한 연애가 서툰 나조차 금방 익숙해지게 만들 만큼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행동들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린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깍지를 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태형은 몸을 내게로 돌려 뺨을 감싸곤 키스를 해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스킨십을 거부할 명분을 잃었다. 김태형도 더는 내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뒤로 젖혀져 있는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입술이 조금 대담하게 나를 점령했다. 우리는 도착할 때까지 틈만 나면 입을 맞췄다. 서로의 머리에 기대 잠을 자다가도 눈을 뜨면 어김없이 입술을 붙여오는 김태형. 그건 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루 종일 키스할 거야?”

 내 침대 위에 겹쳐 누워서 한참 입을 맞추다가 겨우 떼고 물었다. 그러자 김태형은 번들거리는 입술을 길게 당기며 웃었다.

 “응. 밤새 할 수도 있어. 싫으면 말해.”

 싫다는 말을 어떻게 할까. 김태형은 다시 고개를 비틀고 아랫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내가 팔로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며 다시 입술을 뗐다.

 “…싫어?”
 “아니, 궁금해서.”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우리 사귀는 거.”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해줄게 지민아. 진짜 많이.”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또다시 서로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새 남자친구 김태형. 그와 어떤 연애를 하게 될지 궁금했다.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방식의 연애를 하게 될까. 보고 싶으면 보고, 만지고 싶으면 만질 수 있는 평범한 연애. 그러다 보면 전정국을 완벽하게 잊는 날도 올까.





*






 개강한 후 우리는 쉴 새 없이 붙어 다녔다. 김태형은 아예 내가 짠 시간표를 가져가서 그대로 옮겨 적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10시부터 4시까지, 모든 과목의 시간표가 같아서 내 곁엔 김태형이 없는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 술자리고 어디고 간에 늘 함께 다니니, 동기들은 우리를 CC라고 부르며 놀렸다. 우리가 진짜로 사귄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일 테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동기들은 나에게서 김태형을, 김태형에게선 나를 찾았다. 늘 숨기는 연애만 했던 내게 이런 것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과, 같은 동아리. 김태형이 내 일상에 가득 녹아들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김태형은 자연스럽게 내 자취방으로 향했다. 굳이 데려다주겠다는 걸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김태형과 연애를 시작했는데, 혹시라도 전정국이 나를 찾아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놀이공원에서 이별한 후 두 달이 훌쩍 지날 동안 연락 한 번 온 적 없었지만, 이제라도 전정국이 나타난다면 또다시 괴로움이 시작될 것 같았다. 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면… 난 대체 어떻게 살아야할까.

 원룸 건물 앞에 가까워질 때마다 반사적으로 김태형의 손을 꽉 쥐었다.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전정국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은 집 앞에 못 보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덜컥 두려워졌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 전정국이 거기서 나오지는 않을까. 이미 내게 상처를 많이 받았겠지만, 막상 내가 김태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더 많이 아플까 봐. 차마 그걸 볼 자신이 없다.

 “산책하다가 들어갈까?”

 김태형은 내가 주춤하는 이유를 아는 건지, 손을 잡아끌며 왔던 길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잠자코 그 손을 잡고 돌아섰다. 밤늦은 시각, 우리는 40분이 넘게 말없이 동네를 걸어 다녔다. 한참 뒤 집 앞에 도착하니 아까 봤던 차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차가 전정국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전정국의 차종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허탈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바닥에 찧었다.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괜찮아?”
 “아…”

 무릎을 감싸 잡고 신음을 삼키며 괴로워하자 김태형이 얼른 그 아래에 반 무릎을 꿇고 나를 살폈다. 하필 청바지의 찢어져 있는 부분으로 찧는 바람에 살갗에 상처가 생겼다. 계단 모서리 자국대로 길게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온다. 김태형의 손이 안절부절못하며 허공에서 떠돌았다. 아프다. 나는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김태형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었다. 진짜 아프다. 너무…

 “따가워?”

 걱정스레 묻는 김태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득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니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전정국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따가워?’

 그건 내가 전정국에게 들은 첫 마디였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체육시간에 넘어져서 무릎에 피를 질질 흘리던 내게 전정국이 했던 말이다. ‘따가워?’ 살갑게 물어보는 목소리에 나는 아픈 것도 잊고 그 애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봤다. 우린 같은 반이었지만 학기 중반이 되도록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한 사이였다. 다친 다리를 끌고 들어간 보건실에는 선생님 대신 전정국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몸을 일으키던 녀석. 나는 그 잘생긴 애랑 단 둘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게 어색해서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 박지민이지?’
 ‘응.’

 전정국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나는 평범하고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는 애였고, 전정국은 아이돌 연습생으로 전교생에게 유명한 애였다. 그런 애가 나를 안다는 게 조금 신기하고 기분 좋아서 히죽 웃음이 샜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네가 내 이름 아는 거랑 똑같지.’
 ‘…….’
 ‘사실 출석부를 때마다 네 목소리가 예뻐서 기억했어.’
 ‘…예뻐?’
 ‘아, 미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목소리 예쁘다, 하고 생각해가지고.’

 전정국은 나를 의자에 앉히고 의사라도 되는 양, 무릎의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소독약 발라야 할 것 같은데. 선생님 자리 비우셨거든. 점심시간 지나고 오신다고 했는데.’
 ‘아….’
 ‘내가 발라줄까?’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전정국은 테이블을 뒤적거려 빨간 약을 꺼내 흔들었다. 그 살가운 태도에 마음속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처음 대화해보는 사이인데도, 전정국은 원래 친한 사이인 것처럼 나를 대했다. 내 앞에 가까이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어설프게 내 상처 위로 빨간 약을 뿌렸다. 그러다가 상처를 건드려서 나도 모르게 아! 소리를 냈다.

 ‘아 깜짝이야.’
 ‘미안, 따가워서.’
 ‘엄살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귀엽게 웃는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눈이 엄청 크고 반짝거렸던 열일곱의 전정국.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꼬리가, 살짝 보이는 토끼 같은 앞니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넋을 놓고 그 애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 때까지 나는 남자고 여자고 간에 한 번도 사귀어본 적도, 짝사랑 해본 적도 없었다. 참 이상한 감정이었다. 전정국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계속 뛰었다. 교실에서 가끔씩 잘생긴 얼굴을 힐끔거렸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왜?’
 ‘어?’
 ‘계속 나 쳐다보길래.’
 ‘아… 잠깐 딴생각 했어. 미안.’

 전정국은 내 말에 귀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축구하다가 다쳤어?’
 ‘아니. 스탠드에서 넘어졌어.’
 ‘너 발이 작아서 넘어졌나 보다.’
 ‘나 발 안 작은데….’
 ‘어, 이 정도면 작은 거 아니야?’

 전정국은 실내화를 벗고 있는 내 발을 덥석 잡고는 이리저리 돌려 보며 구경했다. 나는 그 순간 양말을 신은 내 발에서 혹시라도 냄새가 날까 봐 겁이 났다. 얼른 빼려고 했지만 전정국은 내 발목을 조물거리며 한참이나 구경했다. 다른 애들이랑 발 사이즈 차이가 별로 나지도 않는데, 걔는 내 발이 작다고 했다. 그러다가 기어코 자기 발이랑 겹쳐서 크기 비교를 해보고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별로 안 작네. 미안.’

 ‘너는 어디 아파? 체육시간에도 안 보이던데.’
 ‘나 근육통. 어제 춤 연습을 엄청 오래 했거든.’
 ‘근육통으로 보건실 오는 애는 처음 봤어.’
 ‘사실 체육복 갈아입기 귀찮아서 꾀병 부린 거야.’

 우린 보건실 침대 두 개에 나란히 누워서 말을 주고받았다. 미세한 소독약 냄새와 머리맡에서 퐁퐁 피어오르고 있는 가습기의 뿌연 김, 바스락 소리가 나는 보건실 침구, 그리고 옆 침대에 있는 전정국. 그 모든 것들이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옆에서 전정국이 내 쪽을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왠지 걔와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 못 본 체하며 눈을 꽉 감았다.

 ‘자?’

 전정국은 심심한지 혼자 흥얼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자는 척했다. 옆에서 조금 뒤척거리며 움직이던 전정국이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감미로워서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전정국과 짝이 됐다. 한 분단씩 밀려서 자리를 바꾸는데, 마침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건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나 싶다. 짝꿍이 된 후로 우린 미친놈들처럼 서로에게 빠졌으니까. 자습 시간에 엎드려서 졸다가 눈을 뜨면, 전정국은 항상 나랑 똑같이 엎드린 채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미동도 없이 서로에게 눈을 맞춘 채로 멈춰 있었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우린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남자가 남자를 이런 눈으로 바라본다는 건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란 걸.

 ‘귀여워.’

 전정국은 내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의 손끝이 내 콧망울을 건드렸다. 귀여워. 귀여워. 그 말이 온종일 맴돌았다. 전정국 생각만 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학교에 가는 모든 이유가 걔가 될 만큼 좋아하기 시작했다. 처음 배운 감정이 너무 벅차서,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게 내 인생에서 조금 고뇌해봐야 할 문제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열일곱에 찾아온 첫사랑은 나를 하염없이 흔들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힘든 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정국을 사랑하는 걸 조금도 망설여본 적 없는, 그런 미친 사랑에 대한 벌.


 
 “흐으….”

 나는 무릎을 부여잡고 울었다. 또다. 또 전정국이 날 괴롭힌다. 하다못해 이젠 열일곱의 네가 나를 아프게 한다.  

 “지민아. 많이 아파? 어?”

 우는 나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서 끙끙거리는 김태형에게 몸을 기대고 운다. 끄덕끄덕.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운다.

 “너무 아파….”

 전정국, 전정국, 전정국…….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봐. 너 뭐야 진짜.





*






 “이사 가는 게 어때?”

 김태형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물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걔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면, 이사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
 “너 지금 잘 하고 있으니까, 더 힘들진 않았으면 해서.”

 맞는 말이다. 전정국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기 위한 마지막 방법인지도 모른다. 걔와 나를 이을 수 있는 건 이제 이 집뿐이니까. 이사 가고 나면 더 이상 그가 찾아올까 봐 겁먹는 것도, 함께 뒹굴며 걔를 떠올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전정국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저질러 놓고 마음 수습도 못하는 멍청이 새끼. 구질구질한 새끼.

 “네 말이 맞네. 이사 가야겠어.”

 맥주를 다 비우고 캔을 손으로 구겼다.

 “장하다, 박지민.”
 “같이 살래?”
 “어?”

 내 말에 김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같이 살자고. 나 이사 가면.”

 같이 살자는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다는 걸 김태형도 알 것이다. 눈치 빠른 놈이니까. 태형아, 단 한 순간도 전정국 생각 못하게 해줘. 온통 너로 범벅돼서 걔는 잊어버리게. 혼자 있는 시간이 쌓이면 어김없이 걔가 떠오르니까. 적어도 네 옆에 있을 땐 괜찮더라. 지금보다 더 많이 나 사랑해줘. 내가 전정국을 만났던 시간을 차라리 후회하게 해줘. 뭐 그렇게 허접한 연애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애들 장난 같았다고. 먼 훗날 그런 말 하면서 웃을 수 있게 해줘.  

 “그래도 돼?”

 다시 한 번 내게 확인하는 김태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2학기 종강을 앞두고 우린 학교 근처 원룸을 얻었다. 집이 멀어 통학하기 힘들어했던 김태형은 부모님의 자취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방을 챙겨들고 왔다. 이삿날이 며칠 남았는데도 이삿짐 챙기는 걸 도와준다는 핑계를 대며 그랬다. 나는 얼마 없는 짐들을 박스에 챙기면서 그와 시시콜콜 잡담을 했다. 주로 긴 긴 방학 동안 뭘 해야 할지에 관한 것이었다. 김태형은 나와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이삿짐은 많지 않았다. 파란색 이삿짐 박스 하나에 모든 짐이 다 들어갔다. 짐을 챙기다 보니 전정국을 떠올릴 만한 물건들이 많이 보였다. 라면 박스 하나에 꿋꿋이 그걸 다 챙겼다. 김태형과 함께 살 집에 차마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것들을 차곡차곡 담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절대로 추억 팔이 하지 않으리라. 전정국과의 연애기록이 고스란히 녹아든 물건들이었지만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박스에 넣어 테이프로 밀봉을 하면, 앞으로는 이걸 열어볼 일은 없겠지 싶었다. 내 청춘이 상자 하나에 다 담겨 나가는 기분이다.

 상자를 닫기 직전, 전정국이 줬던 휴대폰을 발견했다. 그걸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상자 속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잡동사니 안에 섞여 들어가 자취를 감춘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전정국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상자를 본가에 택배로 부쳤다. 관계의 끝. 이젠 정말로 끝이어야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김태형과 내가 사귄지 100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사한 날 밤, 우리는 함께 앉아 소주를 마셨다. 편의점에서 사온 레토르트 식품이 안주거리의 전부였지만 술맛은 좋았다. 바닥에 앉아 침대 매트리스에 등을 기대고 술잔을 기울였다. 룸메이트가 된 기념으로 짠, 사귄지 100일 넘은 기념으로 짠, 종강 기념으로 짠. 우리는 별의 별 이유를 들어 술잔을 빠르게 부딪쳤다.

 빈 소주병이 세 개로 늘어났을 때, 우리는 알딸딸하고 몽롱한 와중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그렇게 평소처럼 키스를 하다가 몸이 눕혀졌고, 조금 취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만졌다. 김태형의 커다란 손이 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유두를 지분거렸다. 나는 내 위에 올라탄 채로 입술을 빨고 있는 김태형의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목에 걸린 옷을 벗어던진 그가 다시 내게 입을 맞추다가 턱과 목덜미를 핥기 시작했다. 나는 술기운이 올라 빨개진 눈으로 낯선 집 천장을 보며 숨을 내뱉었다.

 김태형은 조금 흥분했는지,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민아, 나 좋아해?”

 그 물음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야?”
 “안 좋아하는데 사귀겠냐?”
 “…진짜지?”
 “버렸어. 다. 보내버렸어 저 멀리.”

 전정국을 떠올릴 수 있는 건 다 보냈어.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상자 안에 넣어서.

 “고마워. 사랑해 지민아.”
 “키스해줘.”
 “응.”

 김태형은 키스해달라는 내 말이 허락인 걸 눈치 챈 모양이었다. 내 몸 여기저기를 빨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슴팍을 간지럽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눈을 감았다. 방 안에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가 가득했다.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김태형에게 집중했다. 그가 나를 만지고, 내 성기를 입에 넣어 빨기 시작했다. 남자의 것을 한 번도 빨아본 적 없으면서 서툴게 입술을 움직이며 애무했다. 나는 허벅지 사이에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절정을 맞이했다. 남자와의 관계가 처음인 김태형은, 자신의 앞에서 사정한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어때?”
 “신기해. 좋기도 하고.”
 “…….”
 “다른 남자는 안 될 것 같아. 너만 가능해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김태형이 만약 나와 헤어진다면, 남자를 사랑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얘를 괜히 이쪽으로 끌어당긴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다.

 나를 두고 오래 참아온 김태형을 위해 정성껏 그의 몸을 핥았다. 커다란 성기를 입에 넣고 움직이자 그가 낯선 신음을 냈다. 나는 그의 앞에 엎드린 채로 순종적으로 그의 몸 곳곳을 정복해나갔다. 내 앞에서 아직 사정하지 못하는 그의 것을 쥐고 손으로 흔들어주자 미간을 좁히며 탄식하는 소리가 터졌다.

 “지민아… 아…”
 “왜 못해. 해도 돼. 닦으면 돼.”
 “지금 꿈꾸는 것 같아.”
 
 김태형은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어루만졌다. 우리는 알몸을 겹친 채 침대를 계속 굴러다니며 서로에게 살갗을 비볐다. 그러다가 마침내 내 몸 안에 그가 들어올 차례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난감해 하는 그 대신, 나는 스스로 바디로션을 내 그곳에 바르며 다리를 벌렸다. 김태형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괜찮아.”

 단단하게 선 것을 쥐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김태형이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고 천천히 내 몸 안에 자신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내 안에 가득 삽입되는 이물감을 느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랫동안 하지 않아 꽉 다물려진 그곳이 버겁게 그를 받아들였다. 김태형은 입술을 씹으며 더 깊숙하게 내 안을 채워갔다. 조금씩 움직여지는 그의 성기를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또다시 전정국이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급하게 막으려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형아.”
 “응.”
 “아… 태형아.”

 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움직였다. 찔꺽거리는 마찰소리와 함께 우리가 앞으로 함께 쓸 침대가 젖어들었다. 나를 가지고 있는 이 행위가 좋은지, 김태형은 그 큰 눈 안에 내 표정을 계속 담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절정에 다다랐다. 발끝까지 저려오는 감각에 몸을 비틀며 쥐어짰다. 내 안에 사정한 그가 다시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김태형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어서 미안해….”
 “괜찮아. 울어도 돼.”
 “미안해 태형아….”
 “네가 나 좋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김태형은 울고 있는 내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내게 속삭였다. 이제 걔 완전히 잊는 거야. 그건 이제 내 몫이야. 나 누굴 이렇게 사랑하는 거 처음이야. 너 이제 내꺼야. 나 내꺼 안 놓쳐.

 내꺼, 절대 안 놓쳐.





*

*

*






 우리의 청춘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다. 울고 웃고 괴롭고 힘들어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쉼 없이 흘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어느 정도 동의한다. 내 청춘은 치열하고 아팠다. 스무 살의 나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쳤다. 죽을 것 같이 아팠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내가 왜 그깟 감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었는지 돌이켜보다가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내가 스스로와 싸우며 울 때마다 김태형은 내 곁을 꿋꿋이 지켰다.

 스물한 살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 인터넷에서 전정국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봐도 더 이상 몸이 굳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TV에서 그 얼굴을 봐도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전정국을 찾아보는 일은 없었지만, 쉴 새 없이 TV에 나오는 그를 억지로 외면하지도 않았다. 나를 대신해 채널을 돌리는 건 오히려 김태형이었다.

 스물두 살에는 김태형과 함께 동반 입대를 했다. 같은 부대에 배치 받아서 2년 동안 한 건물에서 그를 자주 마주쳤다. 군 생활은 딱히 어렵지도 쉽지도 않았다. 늘 평범했던 나였기에 별 다를 게 없었다. 아마 연인과 함께 군 생활을 한다는 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태형이와 함께 휴가를 받아 나왔고, 우리는 집으로 가기도 전에 여관에 들어가 뜨겁게 섹스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갈급한 존재가 되어갔다.

 제대를 하고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내가 전정국을 만난 시간보다 김태형과 사랑한 시간이 더 길어져 있었다. 평범하고 안정된 연애는 삶의 활력이 되었다. 우리는 복학해서도 함께 살며 더욱더 깊어졌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불안해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술에 취해 내게 그랬다. ‘지민아. 난 이제야 확신이 들어.’ 그 말은 곧 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진심으로 알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김태형을 뜨겁게 사랑했다. 내가 애정에 목마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물을 주는 그에게 푹 빠졌다. 그는 절대로 나를 외롭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스물일곱이 되었다.
 7년, 7년이면 괜찮을 줄 알았다. 정말로.






 








(+) 시작해볼까요?


레몬향  | 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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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티1013  | 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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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케익  | 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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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  | 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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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 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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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right  | 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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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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