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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야사 二 랠리 씀

Gesture of Resistance


혼백야사













 제2장



 활시위를 당기는 몸짓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사냥감을 노려보는 눈빛은 예리하며 화살을 놓기 전 숨을 멈춘 얼굴은 정연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촉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노루의 목덜미에 꽂혔다. 즉사한 짐승은 힘없이 쓰러졌다. “명중이옵니다!” 붉은 깃을 흔들며 들려오는 소리에, 옆에 있던 전이석이 기다렸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형님 솜씨는 여전하시네. 역시 실전에 더 강하시다니까. 대장군 설 자리가 없겠습니다. 형님께서 이대로 전장에 나간다고 하면 무인들 모두 실직하는 것 아니오?”
 “나더러 전장에 나가라는 소리 같구나.”
 “에이, 어찌 곡해하여 들으십니까.”

 이안은 아우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며 쓰러진 사냥감을 향해 걸었다. 이석은 바짝 따라붙으며 쉼 없이 조잘거렸다.

 “형님의 활 스승을 달포만 제게 빌려주는 건 어떻습니까?”
 “스승은 물건이 아니다. 예를 갖춰 말해라.”
 “환관 나부랭이에게 스승 소리 붙여주는 것도 과하죠. 우리 형님은 예를 너무 지키신다니까.”
 “왜 왔어.”

 노루의 목에서 화살을 뽑아내자 대기 중이던 환관 하나가 얼른 받아들었다. 이안은 죽은 노루의 콧등을 두어 번 문질러주곤 상체를 옥죄던 화살집을 벗어 넘겼다.

 “형님도 참, 정 없게 말씀하시네. 형님 사냥하시는 모습 눈에 담는 것 취미로 삼은 지는 오 년도 넘었지요.”
 “용건만 간단히 해.”

 이안은 수다스러운 제 이복동생이 귀찮았다.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는 필시 전할 말이 있거나 알아내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일 터. 말 위로 훌쩍 오른 그가 이석을 내려다보며 반듯한 이맛살을 구겼다. 당장 사냥터를 뜰 모양새에 이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에 있던 금선태감에게 물었다.

 “어디 가시는 모양이지? 형님의 양기가 내게도 느껴지는 걸 보니 좋은 데라도…”
 “폐하께서 점심수라에 부르셨사옵니다.”
 “허어, 그렇구먼.”

 몰랐다는 얼굴로 떠보지만 진작에 소식을 듣고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안은 속내가 빤히 보이는 이석을 보며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숙환으로 자리보전한 지 열닷새가 넘은 황제였다. 궁녀가 숟가락수발까지 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자리에 장남을 부르는 것은 긴밀한 용건이 있다는 의미였다. 워낙 황궁 내 소식에 기민한 아우였지만, 황제가 계신 일영궁의 소식에까지 빨리 닿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의 어미 한 귀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였다. 기실 황궁 안의 관심사는 황제의 *선위에 쏠려 있었다.

 *선위 :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형님께 식사자리를 청하려 했는데 한 발 늦었네요.”
 “그래. 다음에 함께 하지.”
 “좋은 술이 들어와 대접하고 싶었거든요.”
 “아바마마의 병환이 깊으니 잔치는 자제하도록 해.”
 “잔치는 아니고…. 소소하게 한 잔 올리려 했지요.”
 “네게 소소한 술자리가 있었던가.”

 이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우의 입이 합 다물렸다. 금선태감은 씨근대는 입꼬리를 숨기며 이석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목덜미가 빨개진 것을 보니 약이 오른 모양이다.

 황제의 정실부인 연 씨의 장남 이안, 후궁 한 씨의 장남 이석. 두 황자는 어려서부터 우애가 깊었으나 이안의 나이 열셋에 태자로 책봉된 이후로 조금씩 달라졌다. 이석 황자의 외조부는 승상을 지내는 자로, 제 딸과 손주를 통해 큰 권세를 얻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정치인의 권력욕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황권을 넘본다면 위험한 법이다. 황후는 늘 이안에게 말했다. ‘태자, 이석을 가까이 하지 마세요.’ 이안은 어머니를 통해 듣는 황궁 내 권력다툼과 정치적 입지, 황권, 그런 것들에 싫증을 느꼈다. 그러나 장차 황제가 될 몸이었기에 모르는 체하지 못했다. 그렇게 조금씩 아우와 거리를 두었다. 이석은 한 씨 집안사람답게 영악했으나 속내를 모두 읽힐 만큼 아이 같은 면이 있었으니, 이안의 마음 한 켠에는 아우를 향한 측은지심이 자라기도 했다.

 “그럼 저녁엔 시간이 어떠십니까.”
 “귀비께서 오늘 나와 술자리를 꼭 하라더냐.”
 “예? 아, 아뇨. 그게 아니고…….”
 “나중에 연통하마.”

 얼빠진 아우를 뒤로하고 이안은 말의 허리에 발길질했다. 그를 태운 말은 빠른 속도로 사냥터를 빠져나갔다.

 “형님! 형님!”

 태자의 뒤를 따르는 호위관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뿌연 흙먼지를 내며 자취를 감춘 자리에서 이석은 멍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어쩜 그리 눈치가 빠르신 거야?”

 곁을 지키는 환관들은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이안은 아버지를 향해 큰절을 올리곤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는 오랜 지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깊어졌다. 홀쭉해진 뺨과 거무죽죽한 낯빛을 보자 한숨부터 터졌다. 그의 춘추는 불혹을 갓 넘겼으나 외모는 환갑을 지낸 노인과 같았다. 이안은 곧 임종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아비의 몰골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구나.”
 “어찌 밝을 수 있겠습니까.”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친 듯 황제는 적삼 차림으로 숨을 골랐다. 얼굴은 식은땀으로 축축했으며 곤죽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행위조차 쉽지 않아보였다. 이안은 일영궁으로 자신을 부른 연유를 기다리며 숨죽였다. 잠시 뒤 궁인들을 밖으로 물린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주국에 다녀오너라.”

 늘 아비는 본론부터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얼마 전 북현성벽의 화적떼를 기억하느냐.”
 “예.”
 “그 주동자가 성주국 후작 쪽이다.”

 성주국은 *황태제의 장인이 통치하는 제후국이다. 현의 북쪽 국경과 닿아 있으며 많은 제후국 중 가장 기세가 높은 곳이기도 했다. 사돈 집안에서 국경을 위협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더군다나 북현 부근은 워낙에 크고 작은 화적 무리가 많은 곳이며 주로 그들의 목적은 재물이었다. 얼마 전 성벽에 모인 화적떼 역시 그 규모는 컸으나 큰 위협이 되지 않아 성벽의 군사 한 소대만으로 해결되었다. 황제는 생기 없는 눈동자를 가만히 맞추며 잠시 침음하다가 입을 떼었다.

 *황태제 : 황제의 형제

 “역모와 다를 바 없는 게지.”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예?”
 “화적떼는 전멸했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

 이안은 아비의 말이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성주국 후작의 장자가 화적떼와 교류를 한다더구나. 그만하면 충분히 이유가 되는 것이지. 그 자의 목을 네가 직접 가져오너라.”

 작은 아버지의 처남의 목을 직접 베라는 말과 같았다.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이 들은 것을 다시금 되새겼다. 아버지는 현에 속한 40여개의 제후국을 벌벌 떨게 할 만큼 강건한 군주였다. 필요에 따라 적당한 명분을 세워 가지를 쳐내는 데에 능했으며, 신하의 두려움을 비료 삼아 지존의 면모를 나날이 높여왔다. 그런 황제가 병환으로 드러누웠으니 안팎으로 현국의 정세가 흔들리는 건 당연지사. 황위가 바뀌면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 권력의 이치였다.

 “그 말씀은…”
 “네가 어떤 군주인지 보여주렴.”

 그러니 황제는 이안의 자리를 미리 닦아두는 것이다. 법도 상 선위의 일 순위는 황태제였으나, 황제는 제 아우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만일 황태제가 황위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어떤 명분을 들어 이안의 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번엔 성주국 후작 아들의 목이지만 그 다음은 후작이 될 것이다. 또 다음 차례에는 어떤 제후국이라도 될 수 있지.”
 “…….”
 “태자, 기억해라. 황위를 지키는 것은 최초이자 최후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한 승상이 네 자릴 위협하면 쳐내야 할 것이고, 또 다른 자가 커지려 한다면 그 역시 싹을 잘라야 하느니라.”

 권력에 도전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완전한 황제가 되는 것. 대상이 친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지난 20여 년간 아비가 걸어온 지존의 길이었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오늘 밤이다. *태일위가 널 따를 것이다.”

 *태일위(太日衛): 황제의 친위군

 이안은 헛숨을 삼켰다. 말하는 데에 모든 기운을 썼는지 황제는 가슴을 움켜쥐며 기침을 토했다. 잠시 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기던 이안은 이내 깊어진 눈매로 아비의 시선을 마주했다. 깎아놓은 듯한 그의 옆얼굴에는 아직 화창한 태양빛이 드리웠다. 그러나 때가 되면 곧 이울 빛이었다.

 “…황명 받들겠나이다.”

 북현으로 가는 것은 황제가 되는 첫 걸음이었다.





 
*






 지민은 삿갓을 눌러 쓰고 산 아래로 향했다. 어미를 닮아 유난히 흰 피부가 은근히 신경 쓰여 사람이 많은 곳에선 반드시 얼굴을 가렸다. 이미 서낭당 뒷집 천혜령과 음인 아들에 대한 소문이 저잣거리에 널려 있으니 괜한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도 꼭 그래야 했다. 음인은 천민 중에서도 천한 취급을 받았기에 자칫 양반이나 무뢰배의 눈에 띄어 봉변을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의 곁을 졸졸 따르는 여인의 혼백이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지민은 못 들은 체하려고 애썼지만 한이 가득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이 산의 지박령 중 가장 원한이 깊은 처녀귀신이었다. 게다가 살아생전 음인이었다고 하니 맺힌 한이 더 큰 것이다.

 “나한테 이래봤자 소용없어. 그저 품삯을 받으러 가는 길이니 기대하지 마시오. 몸 사리기 바쁜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겠어….”

 손재주가 좋아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지민이다. 양반댁 마님이 지민의 바느질 솜씨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여 이번에도 바느질감을 한 가득 완성해 가져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혼백은 지민이 마을로 향할 때마다 졸졸 따라와서 제 원한을 풀어주길 바랐다. 자신의 이름을 ‘홍주’라고 밝힌 적 있었다. 홍주는 제 아랫배를 가리키며 앞을 가로막았다. 자궁이 있어야 할 자리에 총알이 파고들었는지 크게 구멍이 나 있다. 지민은 매일 보는 구멍이 통 적응되지 않아 얼른 눈을 돌렸다.

 “많이 아팠겠소.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한을 풀어주겠어. 나도 똑같은 음인일 뿐이오.”

 지민이 힘없이 말하며 터덜터덜 걷자 혼백이 다시 앞장서서 가로막으며 쏘아보았다. 다른 이가 본다면 오금이 저릴 광경이었으나 지민에겐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무섭다기보다는 피로했다.  

 “차라리 양인 권세가를 찾아가시오. 그 모습만 보여줘도 자지러지면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텐데….”

 그 말에 홍주가 팔짱을 끼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아차 싶어 뒷목을 긁었다.

 “아, 미안. 지박령이었지.”

 산을 벗어나지 못하는 혼이었다. 여태 들은 바로, 음인이었던 홍주는 이 산 속에서 갑작스레 변고를 당했다. 여염집 장녀였는데, 총을 가진 양인 사내에게서 도망치다가 결국 붙잡혀 그렇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사연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민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음인 여자는 평인에 비해 임신이 잘 되었기에 세 개의 삶 중에 하나를 골랐다. 불임탕약을 마셔가며 기생으로 사느냐. 양인 짝을 만나 일찍이 아이를 낳고 사느냐. 그것도 아니면 음인들이 모여 사는 ‘음지골’에 들어가 욕망을 누르며 죽은 듯이 사느냐.

 반대로 남자 음인은 희귀한데다가 아기를 가지지 못하니 양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말하자면 ‘수태’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씨를 뿌려도 결실이 없으니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자그마한 부담을 덜어준다. 남남의 비역질은 꼴사납고 추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 중 하나가 음인이라면 생각을 달리했다. 음인 남성은 자신의 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선택지는 두 개다. 순응하느냐, 꽁꽁 숨느냐. 지민의 어미는 제 아들이 음인이라는 사실에 치를 떨었으나, 칼날 같은 말과는 다르게 손수 딴 개회나무 꽃과 약초로 향유를 만들어 향갑을 채워주었다. 지민은 목에 걸린 향갑이 제 특질을 숨겨줄 방패처럼 든든했다. 그렇다고 해서 음인인 것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지만.

 “알겠어 알겠어. 혹시 높으신 분을 마주친다면 꼭 그리 전해주겠소.”

 귓가에 끊임없이 흐느끼는 혼백을 향해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어느덧 산 밑자락에 다다라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홍주는 더 따라오지 못하고 뚱한 표정으로 멈췄다. 지민이 힐끔 뒤를 보니 그녀는 구멍난 제 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더니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지민이 눈아래 살을 끌어올리며 어색하게 미소를 던졌다. 그러자 홍주는 안심한 듯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휴….”

 긴 한숨을 몰아 쉰 지민이 등에 있는 천 주머니를 고쳐 매곤 품삯을 받을 곳으로 바삐 움직였다. 숨어 사느라 저잣거리에는 달포에 두 번 정도만 모습을 비췄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거의 마을로 내려간 적이 없었고, 혹시라도 마을에 다녀온 것을 들키면 종아리에 매질을 당했다. 천혜령은 지민이 산을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랬던 어미가 이제 와 아들을 홀로 버려두고 떠났다는 것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다다를 때면 지민은 어머니가 진짜로 죽은 것일까 봐 두려워 생각의 가지를 뻗치지 않으려 애썼다.



 “참 곱기도 하다.”

 여인은 지민이 가져온 비단을 훑으며 감격한 목소리를 냈다. 윤기가 흐르는 보 위에는 지민이 직접 놓은 봉황 무늬 자수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여인은 정갈한 자수와 지민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웃음기를 숨기지 못했다.

 “어쩜 사내의 몸으로 이리 솜씨가 좋을까.”
 “과찬이시옵니다.”
 “몇 가지 더 부탁해야겠구나. 혼례까지 말미가 있으니 괜찮겠지? 며늘아기 자수도 예쁘게 부탁하마. 품삯은 넉넉히 쳐줄 것이네.”
 “소인은 그저 일거리를 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매우 흡족한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산에서 할 일이 없어 집에서 굴러다니던 바늘과 실로 그림을 그렸다. 이제는 제법 숙달이 되어 삯바느질을 할 정도에 이르렀다. 천혜령은 바느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아들이 못마땅해 잔소리를 했었다. 그러나 치맛단에 화려한 꽃을 수놓았을 때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들이 새긴 자수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지민은 늘 자신을 구박하면서도 감정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내는 젊은 어미가 사랑스러웠다.

 “저런. 손끝에 상처가 많구나.”
 “아, 별것 아닙니다.”

 여인은 바늘에 찔린 상처가 남아 있는 지민의 손가락을 발견하고 그렇게 말했다. 자수를 놓다가 어머니 생각에 종종 멍해지는 바람에 사소한 실수가 많았다. 지민은 부끄러워 손끝을 감추며 얼굴을 붉혔다.

 “연고를 가져오라 이를 테니 바르고 가거라.”
 “이,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자신을 향한 애정 어린 마님의 시선에 지민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평인인 이 여인은 지민이 음인인 것을 알지 못해 친절을 베풀고 있지만, 혹시라도 이 집의 하인들 중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너그러운 시선이 이내 불쾌감으로 바뀔 것이다. 천하디 천한 음인의 손에 제 아들의 혼례복 자수를 맡기는 것은 상상도 안 해본 일일 테니. 그러니 더는 지체하지 않고 품삯만 받아 빠져나오는 게 상책이었다.

 “수줍음이 그리 많아서 장가는 어찌 가려고.”

 아무래도 마님은 지민의 불편한 기색을 수줍음이라고 멋대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양갓집에서 바느질감을 받은 지 벌써 반 년이다. 나이가 지긋한 여인은 항상 지민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사내답지 않게 고운 얼굴과 작은 체구, 그리고 유려한 바느질 솜씨까지 어느 것 하나 기특하지 않은 게 없었으니 사람 대 사람으로 느끼는 기분 좋은 호감이었다. 지민은 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마님을 애써 외면하며 거리를 두려 했다.

 “아차, 품삯부터 내줘야지. 나이가 드니 깜빡깜빡 한다네.”
 “…천천히 주셔도 되옵니다.”
 “그리 안절부절못하면서 무얼.”

 그런 연유가 아니었으나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꿇어앉은 제 허벅지를 긁었다. 이내 제 앞에 내밀어진 돈 꾸러미를 받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두둑하게 받았으니 이것으로 또 한 달 넘게 지낼 수 있을 터였다. 시장에서 쌀과 반찬거리를 사 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여유가 있다면 향갑을 채울 향유를 더 만들어낼 재료도 사고 싶었다. 어미가 만들어 놓고 간 향유에 점점 바닥이 보이고 있었다.



 바느질거리를 한 가득 받은 지민은 유쾌하게 발걸음을 뗐다. 그런 지민의 곁으로 저잣거리를 노니는 혼백들이 얼쩡거렸으나 애써 그들이 보이지 않는 체했다. 그러나 귀문이 열려 있는 자를 어찌나 잘 알아보는 것인지, 다섯 보에 한 번 꼴로 다른 혼백이 나타나 귀찮게 말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제 얼굴을 감춘 삿갓을 푹 눌러쓰며 딴청을 피웠다. 저잣거리의 사람들 주위에는 잡귀들이 참 많았다. 등에 올라타 있거나 짓궂게 머리통을 짓누르는 혼백도 있었고, 제가 보이지도 않는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이대며 장난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혼도 지민의 몸에 손을 대진 않았다.

 “안 보이는 척한다고 모를 것 같으냐?”

 누군가가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눈동자만 빠르게 굴려 확인하자 키가 허리 아래에 오는 어린 남자 아이의 혼백이었다. 차림새는 다른 잡귀와 다르게 단정하고 고급스러웠다. 지민은 못 본 체하려 했지만 시선이 가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삿갓 아래에 숨겨진 시선을 들어 마주했다.

 “…말 걸지 마시오. 도령.”
 “여기서 멍청하게 뭘 하고 있어?”

 어린 혼백이 엄한 표정으로 꾸짖듯 말했다. 살아생전 양반댁 도령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시장을 보다 말고 괜히 혼난 기분이 들어 지민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이젠 귀신에게 욕도 듣나 싶었다.

 “밥이 목구멍에 들어가겠어? 네 제삿밥을 미리 준비하는 거라면 인정한다!”
 “도령은 왜 갑자기 시비요? 제삿밥이라니….”
 “집에 가지 말고 그대로 멀리 도망이나 가라!”
 “뭐?”

 순간 지민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거기도 명을 다한 모양이구나! 쯧쯧.”

 노인네 같은 말투로 동자귀신이 혀를 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눈이 반만 열린 게로구나! 한 치 앞도 못 보니. 쯧쯧.”
 “우, 우리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네가 방금 말해줬잖아요…. 지민은 눈썹을 팔 자로 늘어뜨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멍청한 것들은 질색이야!”

 혼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건방진 표정을 했다. 지민은 마음이 불안하여 짚신 신은 발을 돌려 산 방향을 향해 틀었다. 그러자 동자귀가 얼른 앞을 가로막으며 호통쳤다.

 “도망가라니까 거길 왜 가?”
 “도, 도망가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말도 안 해주고!”
 “북쪽으로 가라. 북쪽!”
 “…북쪽?”
 “아, 몰라 마음대로 해! 나는 말 전했다!”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혼백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지민은 선 채로 혼란에 빠졌다. 별안간 북쪽으로 도망치라는 말도, 제삿밥이라는 말도 모두 와 닿지 않았다. 마음 속에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처음 보는 동자귀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평생 떠나본 적 없는 집을 떠나 연고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은 힘들다. 게다가 집에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향유의 여유분이 있지 않은가.

 고민 끝에 지민은 집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서낭당을 향해 숨이 차도록 뛰었다. 양 손에 든 쌀과 찬거리, 등에 달려 있는 비단보로 인해 몸이 무거웠으나 쉴 새 없이 달렸다. 그러다가 서낭당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저 멀리서 올라오는 까만 연기에 동공이 굴러 떨어질 정도로 눈꺼풀을 홉떴다.

 불…!

 분명 서낭당과 자신의 집 쪽이었다.

 지민은 이를 악 물며 힘을 쥐어짰다. 이내 불에 활활 타오르는 서낭당 아름드리나무와 초가집을 발견하고 만다. 그 앞엔 낯선 사내 세 명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짓이오!”

 빽 소리치자 사내들이 고개를 돌렸다. 지민의 눈이 커졌다. 그 중에 하나는 낯이 익은 자였다. 며칠 전 자신을 겁탈하려고 따라왔다가 오줌을 지리며 도망친 사내였다. 그 자가 지민을 발견하자마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목청을 울렸다.

 “저, 저기요! 요사스러운 악귀!!”

 악귀? 지민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 자의 옆에 있던 사내 둘이 눈에 불을 켜며 가까이 다가왔다. 지민은 도로 뒷걸음치며 대체 이 상황이 뭔지 머리를 굴렸다. 조금 전 동자귀신이 제삿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죽임을 당한다는 뜻일까?

 “네가 그 악귀가 들린 무당 아들이구나!”
 “대체… 무, 무슨 소리를…….”
 “다 들었다! 천한 음인 주제에 양인들을 홀려놓고 해친다더니, 곱상한 얼굴을 무기로 요사를 떠는군!”
 “오해요…. 나, 나는 그런 적이…….”

 가까이 다가오는 두 사내는 지민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들고 있는 횃불을 휘두르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뒷걸음을 치던 지민은 바닥에 툭 튀어나와 있는 돌부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끔찍한 꼬리뼈의 통증과 함께 삿갓이 날아갔다. 그늘 진 숲 속에서 오로지 지민의 흰 피부만 빛났다. 대충 묶어놓은 까만 머리카락에서는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으며 넘어지면서 흐트러진 매무새로 인해 얇은 목덜미와 쇄골이 드러났다. 지민의 얼굴을 보자 천천히 달려들던 사내들의 표정이 벌겋게 익었다. 지민은 황급히 소매로 제 코를 틀어막았다. 두 사내에게서 풍기는 양인의 색향이 너무도 강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오호라, 그렇게 유명하더니 이런 걸로 홀린 모양이구나.”
 “나한테 왜 이러시오…. 제발…….”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지민은 더 가까워진 사내들 뒤로 활활 불타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매달려 있던 오색 천들은 이미 타버린 지 오래였고, 꽃잎이 달려 있던 가지들은 탁탁 소리를 내며 장작 노릇을 하고 있다.

 지친다.

 조용히 숨어 살고 있어도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모든 것이 신물 난다. 이제는 서낭당과 집에 불을 지를 정도까지 된 걸 보니, 또 이상한 소문이 돌았겠구나 싶다. 이번엔 무슨 소문일까. 알고 보니 무당 아들놈이 악귀에 씌었다고? 서낭당은 신령 대신 악귀가 지배한다고 했을까? 혼백을 보고 도망쳤던 양인들이 앙심을 품고, 요물을 만났다며 입방정을 떨었을까?

 지겹다. 지겨워. 이 모든 게 자길 버리고 떠난 어머니 천혜령 때문인 것만 같다. 막다른 길에 몰리니 탓할 것이 없어,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원망했다. 신통한 어머니는, 이런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을까? 늘 어머니의 몸주 신은 다양한 것을 예지해 가르쳐주었다. 그러면 제 아들이 이런 위기에 처할 것쯤은 알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죽은 건가 보다. 이곳을 지키던 지박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두면 저 불은 큰 산불로 번지고 말 것이다.

 ‘아!’

 생각을 이어나가던 중 지민의 눈이 별안간 확 뜨였다. 동자귀신. 그 꼬마가 생각났다.

 ‘아, 몰라 마음대로 해! 나는 말 전했다!’

 휘이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불었다. 동자귀를 통해 말을 전한 건, 어쩌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그게 살아 있는 어미든 혼령이든 말이다.

 “그래. 어디 한번… 죽일 테면 죽여 봐.”
 “뭐야?”
 “마음대로 해 보라고!”

 지민은 바닥에 늘어져 있는 짐에서 아까 구입했던 향유기름을 꺼내 재빨리 두 사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기름이 얼굴과 몸에 끼얹어지자 이들이 퉤퉤, 침을 뱉으며 마구 털어냈다.

 “이 미친 악귀새끼가!”

 기름에 젖은 두 남자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지민은 눈을 꾹 감았다. 늘 자신을 도와주던 이름 모를 신령은 서낭당의 신이었을까, 어머니였을까. 아니. 서낭당은 불탔으니 어머니였으면 했다. 참 이상한 생각이다. 늘 어머니가 살아 있었으면 했으나 이 순간엔 어머니의 혼령이길 바란다니.

 “어어?!”

 태풍처럼 거센 회오리바람이 생겨났다. 숲에 쌓여 있던 잎사귀들이 원을 그리며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갈 듯 날뛰었다. 지민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채로 멍하게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이들의 주위를 둘러싼 바람이 허리를 요란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불을 끌어당겼다. 타오르던 나뭇가지의 불이 마치 불똥처럼 마구 튀어 들어왔다. 그리곤 순식간에 세 명의 몸에 화악 붙어 올랐다.

 “아, 뜨! 뜨거!”

 머리카락과 겉옷에 아무렇게나 붙은 불이 정신없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갑작스러운 화마에 휩싸인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횃불을 집어던졌다. 불꽃이 바닥에 떨어지며 흩뿌려진 기름 위를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더 큰 불길이 그들을 잡아먹었다.

 “으아! 으아악!”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그들의 몸을 사정없이 태워갔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며 지민은 천천히 일어나 뒷걸음 쳤다.

 ‘북쪽으로 가라. 북쪽!’

 그래. 북쪽…….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허나 이제는 갈 곳이 없다. 어머니가 돌보던 서낭당 신목은 불탔으며 작은 몸 하나를 뉘일 집도 금세 재가 될 것이다. 동자귀가 전한 것은 어머니의 전언임이 틀림없다. 지민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땀에 젖은 머리 위로 삿갓을 급히 눌러쓴 지민이 정신없이 달렸다. 뭐에 미친 사람처럼 허겁지겁 뛰어 마침내 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산불을 발견한 마을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었다. 지민은 조심스레 몸을 낮추어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북쪽. 북쪽으로 가야 한다.





*






 유난히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이안은 마른 목을 축이곤 답답한 갑옷을 벗겨주는 궁인들의 손에 잠자코 몸을 내주었다.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갑옷을 벗고 나니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나 갑옷 안에 갖춰 입은 옷에도 역겨운 핏물이 튀어 있었다. 이안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자 궁녀들의 손짓이 빨라졌다. 이안은 가만히 팔을 벌려 선 채로 겉옷이 벗겨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하얀 적삼의 고름에 궁녀의 손이 닿자, 조용히 손목을 잡아 떼어냈다.

 “도포를 다오.”
 “…예, 전하.”

 적삼을 갈아입지 않고 다시 외출복을 달라는 말에 금선태감이 눈썹을 까딱 움직이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휴식을 취하지 않으시고…….”
 “가슴이 답답해서 잠시 산보를 해야겠다. 말을 준비하라.”
 “예, 전하.”

 금세 새 도포가 입혀졌다. 이곳은 북현 부근의 행궁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갑갑함이 더했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맨손으로 나와 신을 신었다. 그러자 그의 호위무사 성열이 바짝 따라붙었다. 야심한 시각에 태자 홀로 산책을 하게 둘 위인이 아니다.

 “혼자 다녀오겠다.”
 “아니 되옵니다. 이곳은 북현입니다.”
 “…그래. 북현이지.”

 황태제의 장인 집안 장손을 죽이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곳 말이다. 성주국과 가깝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쯤 후작의 아들 목이 태자의 손에 베어진 사실을 알고 앙심을 품어 모사를 꾸밀지도 모른다. 이안은 성열의 말에 쉽게 체념하곤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성열이 장검을 내밀었다. 칼을 찬 이안이 말에 올랐다.

 “그럼 혼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조금 떨어져서 오너라.”
 “예, 전하.”

 고삐를 당겨 방향을 틀었다. 이안을 태운 말이 힘차게 달렸다. 성주국에서 거사를 마치고 행궁으로 들어오는 길에 드넓은 억새풀밭을 보았다. 이안은 그 곳을 기억하며 정신없이 달렸다. 살육의 회의감을 토하며 고독을 씹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머리 높이까지 자란 억새풀이 넓게 펼쳐졌다. 크게 떠 있는 보름달 아래로 억새풀의 흰 털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광경이 마치 해수면을 보는 것 같아 이안은 시선을 멀리 두며 감탄했다. 뒤이어 도착한 성열의 말발굽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이안은 천천히 억새풀밭을 향해 걸어 나갔다. 말에서 내린 성열은 사방을 둘러보며 경계하다가 한숨을 푹 쉬며 천천히 태자의 뒤를 따랐다.

 이안은 손가락으로 제 인중을 문질렀다. 아직도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다. 후작 아들의 목을 베던 순간 검자루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생생하다. 평소 무술을 연습하며 볏단이나 목각 모형을 수도 없이 베었다. 사냥감의 목을 벤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목을 벴다. 검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고자 평소보다 더 힘주어 휘둘렀다. 예리한 칼날이 꽂히자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그 자의 뜨끈한 피가 얼굴에 튀는 순간, 이안은 앞으로 제가 묻혀야 할 혈흔이 얼마나 될 것인지 생각했다. 그것이 황제의 자리라고 한다면 그러했다.

 칼집으로 억새풀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식은땀을 식혔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지만 이안의 빗어 올린 머리와 통천관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지러운 건 오직 그의 마음뿐이었다. 과연 누가 알아줄 것인가. 심약한 태자라고 하겠지. 곧 황상에 오를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잡념이라고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제 곁을 지켰던 금선태감도 성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안은 억새밭 중간에 털썩 몸을 눕혔다. 아마 뒤따라오는 성열이 발견하면 한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달이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한 움큼 토해냈다. 아마도 며칠 밤은 악몽에 시달릴 것 같다. 아버지가 숙환으로 앓아눕는 순간부터 거의 매일 밤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오는 인물은 매번 달랐다. 어떤 때는 한 귀비였으며 또 어떤 때는 이석이었다. 가끔은 황태제의 얼굴도 나왔고, 어머니인 황후의 얼굴도 나왔다. 그들 모두 자신을 향해 ‘태자 전하’라고 불렀으나 이안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쾌하고 갑갑했다. 꿈속의 자신은 부르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얼어붙기만 했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악몽에 대해 털어놓은 적 있었으나, 그 후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이상한 부적이었다. *기은도감의 *국무가 전해준 것이었다.  

 *기은도감(祈恩都監) : 황실의 안녕을 비는 신사(神事)를 치르는 곳
 *국무(國巫) : 기은도감에 소속된 무당


 이안은 손을 모아 머리를 받친 채 눈을 꿈뻑이다가 천천히 감았다. 풀 냄새를 맡으며 심호흡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으나 이렇게 체통 없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도 퍽 나쁘지 않았다. 황자 시절, 이석과 함께 후원을 뛰놀다가 풀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지만.



 몇 식경이 흘렀다. 이안은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살랑대는 억새풀 사이로 낯선 소리를 감지했다. 이안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칼집에 손을 가지고 갔다. 이런 들판에도 짐승이 사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천천히 발을 떼었다. 성열을 부를까 했지만, 혹시라도 자객이라면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아마도 성열은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을 테니,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다. 스산하게 스치던 소리가 멎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안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검 끝으로 풀을 조금씩 헤치며 전진했다.

 그때 스슥- 하는 기척이 또다시 들렸다. 이안은 재빨리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높이 자라 있던 억새풀이 푸스스 잘려나가며 시야가 열렸다.

 “무탈하시옵니까.”

 그곳엔 성열과, 성열의 검 끝을 마주한 낯선 사내가 있었다.

 “누구냐.”

 이안은 낯선 사내를 향해 물었으나, 그 자는 대답 없이 멍하게 칼끝만 보고 있었다. 겁을 먹지도, 그렇다고 태평하지도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동공에는 초점이 흐렸다. 이안은 미간을 좁히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위험하니 떨어져 계십시오.”
 “그리 위험한 자는 아닌 것 같은데.”

 허름한 차림새의 사내에게는 어떤 무기도 들려 있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순간 이안의 후각을 자극하는 색향이 확 끼쳐왔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주 향긋하고 달큼한 음인의 색향이었다. 그러나 평인인 성열은 맡지 못했을 것이다. 이안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으음…….”

 음인 사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술에 취한 것일까. 그러나 술 냄새는 나지 않는다.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들리지 않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검을 거두어라.”

 이안은 그를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 짙은 색향이 느껴졌다. 이안은 숨이 차오를 정도로 자극하는 향에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그리곤 달빛 아래에 하얗게 빛나는 사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무섭지…. 무서울 테지…….”
 “뭐?”

 낯선 음인이 웅얼거리다 말고 알아들을 만큼의 목소리를 내었다. 이안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어찌… 그리 사셨소…. 불쌍해…….”
 “…….”
 “황제가, 황제는……. 그런 것이오.”
 “뭐라.”

 이안은 제 귀를 의심했다.

 “황상…. 황상에 앉는 게…….”

 사내의 입에서 나온 황제, 그리고 황상이라는 단어에 이안은 눈을 매섭게 뜨며 다시 검을 들어 겨누었다. 천한 신분이 분명한데, 태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니.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나를 어찌 알아보았느냐.”

 이안의 뾰족한 검 끝이 음인 사내의 턱 밑으로 미끄러졌다. 그러나 이 사내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 여전히 풀린 동공으로 조용히 입술만 우물거렸다.

 “…무서운 게지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안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던 음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만개하는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웃음이기도 했다. 광인인가 싶었으나 눈길을 뗄 수 없을 만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였다.

 별안간 음인의 다리가 풀렸다. 이안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검을 내렸다. 달빛을 모아 내리쬔 듯, 쓰러진 음인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전하, 없앨까요.”

 성열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제 앞에서 주군을 능멸한 사내가 못마땅해 당장이라도 검을 찔러 넣고 싶은 듯했다. 어느새 이안의 이마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손등으로 이마를 훔쳐내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가슴 속의 맥이 격동하는 게 느껴진다. 자객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이상한 말을 지껄인 미지의 사내를 향한 호기심이 뒤죽박죽 섞였다.

 “두어라.”
 “예?”
 “음인이더구나.”
 “…….”

 이안의 말에 성열은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명 받들겠나이다.”

 성열은 지체 없는 동작으로 쓰러진 음인을 들어 안아 제 어깨에 얹었다. 가벼운 몸이 종잇장처럼 흐물거렸다. 이안은 앞장서서 걷는 성열의 등허리로 내려온 가느다란 음인의 팔목을 바라보며 천천히 뒷짐을 지며 걸었다.    
  
 모든 것이 유난스러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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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키미니  | 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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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ong95  | 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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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구이  | 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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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 200218   
하 분위기가... 그 장면이 눈 앞에 있는 것 같아요 랠리님
Haonn  | 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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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꾸하뚜  | 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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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행복  | 2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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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  | 2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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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국민빵  | 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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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소년단  | 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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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빔  | 200304   
위에 여름님 말처럼 정말 그 자리에 한켠에 제가 서잇는 것 같아요. 어쩜 이리 묘사를 잘하세요(사극뽕이 차오른다) 글이 흡입력이 있어요. 너무 신기해요. 조금만 읽고 할 일 하려고 했는데 흐름을 깰 수가 없었어요. 커플링을 떠나서 글솜시 자체를 존경합니다.
Min,a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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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밍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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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슈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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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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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가캐리해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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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낭케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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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마녀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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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엔  | 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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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이  | 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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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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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꼴찌 댕댕이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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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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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향기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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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미꾹꾸  | 2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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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아이  | 2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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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22  | 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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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 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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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숙  | 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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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ana  | 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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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밍  | 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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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ol  | 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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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kminzoa  | 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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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송  | 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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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  | 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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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love  | 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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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  | 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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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희  | 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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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하리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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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주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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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씨앗  | 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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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  | 2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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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홍시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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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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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꾸와침침  | 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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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뜨  | 2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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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국세상  | 2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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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원  | 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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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까지가자  | 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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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팍  | 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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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jdrnr91  | 2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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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처돌  | 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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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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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소울  | 2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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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꾸빠  | 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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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기랑 달까지  | 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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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기mini  | 2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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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10531   
저도 억새풀 사이에서 몰래 지켜보다가 그들이 떠나고 나서 숨돌렸네요
Jam1e  | 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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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돌님  | 2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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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 2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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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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