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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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라는 것 랠리 씀




전부라는 것











공항 게이트 문을 밀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덮쳤다. 웅웅거리는 말소리와, 털털거리는 엔진의 공회전 소리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들려왔다. 북해도의 첫 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차가웠다. 마침 눈발이 휘날렸다. 호흡할 때마다 허연 입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다가오는 택시기사에게 정중하게 손바닥을 내 보이고는 삿포로의 눈을 향해 발을 떼었다.

우드득. 무언가의 생명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걸음마다 자국을 남긴다. 이곳의 눈은 질긴 힘줄을 가지고 있다. 단단하게 뭉치려는 그 성질이 나를 꽁꽁 숨겨줄 것이다. 날이 풀려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내 시체를 찾지 못할 것이다.

⌜いらっしゃいませ⌟  
어서오세요

감정 없는 인사말이 쓰인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내가 왔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기 딱 좋은, 이 곳 삿포로에.




*





설산이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짐 가방은 무거웠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죽으러 온 사람이 무슨 짐이 많은가 하면, 나를 좀먹던 기억이 담긴 모든 물건을 챙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내 흔적을 지울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함께 사라지고 싶었다. 눈 무덤에서 내가 발견되더라도, 그게 나라는 사실을 찾기 힘들도록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떠날 요량이었다. 우리는 북해도의 눈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낡은 바닥에 누웠다. 퀘퀘한 먼지내가 올라오는 양탄자 위에 머리를 대고 모로 누웠다. 보일러를 때지 않아 온 방 안에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다. 목이 칼칼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지만 추위가 느껴져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죽으러 온 마당에 추위도 타는구나. 너털 웃음이 났다.

퀘퀘한 냄새가 나는 담요를 덮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외투에 달린 보드라운 털이 뺨에 닿았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느꼈다.

까무룩 잠이 들 것 같다.




*





그때였다.

처음 보는 형체가 꿈틀거리면서 시야의 한 귀퉁이에서부터 나타났다. 미동 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 내게 다가온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의 모습이었다. 벌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뒷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놀라 눈을 빠르게 깜빡이자 그것이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했다. 괴기한 모습으로 움직이며 내 캐리어로 다가갔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생명체가 내 짐가방을 천천히 풀어헤쳤다. 무얼 하는 거야. 물어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녀석이 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내 가방 속 물건을 하나 하나 꺼냈다.
정국이가 벗어놓고 갔던 셔츠, 정국이가 쓰던 칫솔, 정국이의 머리카락이 남아있는 머리 빗.

하나씩 가방 밖으로 꺼내질 때마다 나는 슬퍼졌다.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정국이의 손 때가 묻은 책가지들, 정국이와 나의 사진 앨범.....
기어코 캐리어 안의 모든 물건을 바닥에 늘어 놓은 그 녀석이 나를 힐끔 보았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궁금해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녀석이 내 물건을 하나씩 하나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황당해서 더 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건을 이로 갉아서 하나씩 없애버리는 모습은 도대체가 텍스트로 설명이 불가한 장면이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정신 차려. 침착하자 박지민.

"버리고 싶어 했잖아. 내가 먹어줄게."

녀석이 덤덤하게 말했다.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더 놀랐다. 나는 합죽이가 되었다. 녀석이 한 말이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것들을 다 태워 없애버리고, 나 자신까지 버리려고 온 것이었으니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잠깐만."

녀석이 사진첩을 먹기 시작했다.
왠지 저지하고 싶었으나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눈빛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





녀석이 내 물건들을 하나씩 먹어치웠다. 함께 맞춰 입었던 잠옷, 그가 내게 선물한 속옷, 함께 동대문을 돌아다니다가 나눠 낀 팔찌.....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머릿속이 흐려졌다. 마치 수명을 다한 형광등처럼 깜빡 깜빡. 암전 되었다가, 환해졌다가, 아렴풋해졌다가, 이내 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대체?

그의 물건들이 자취를 감출 때마다 녀석의 몸집은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손가락 만했던 녀석이 팔뚝만해지고, 사진 앨범 하나를 다 먹어갈 즈음엔 27인치 캐리어만큼 자랐다.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물건들이 사라질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에 대한 기억이 아렴풋해지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앉은 걸음으로 조심스레 녀석에게 다가가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려보았다.

"네가 먹으면 기억이 사라지는구나."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민했다. 이런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그럼, 내가 살고 싶어하는 일말의 의지도 먹어줘."

혹시 마지막 순간에 떠오를지도 모르는 삶에 대한 단상이라던가,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생각이나,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이 떠오르는 그런 것들. 그런 불상사를 막고 싶었다. 그 따위 것들이 내 죽음을 방해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는 완벽하게 죽어야 했다.

그러나 녀석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러더니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낯이 익었다.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녀석의 모습은 무어라 정의하기 힘들 정도로 모호했다.

나는 녀석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영 어색했다. 죽을 때가 가까워 오면 만날 수 있는 정령이나 사신 같은 것이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건 안 돼. 대신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을 모두 먹어주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련, 과연 남아있을까.


머릿속에 재생되는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이 내 팔을 부여잡았다. 그러더니 내 옷깃과, 눈물이 말라붙은 관자놀이와,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품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기억이 아득해졌다. 그러면서도 금세 평온해졌다.

이 기괴한 녀석이, 누군가의 지문이 묻어있을 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왜 울어?"

녀석이 물었다.

"모르겠어.. 가슴이 아파."

코 끝이 시큰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훌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새 녀석이 내 키를 넘어선 만큼 자라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녀석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를 무척 닮아있는 것 같다.




*





녀석이 내 품을 뒤적거리더니 구겨진 청첩장을 찾아냈다.

신랑 전정국. 신부 김OO.
그걸 보자 가슴 한 구석이 저릿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알았던 것도 같은데.

"이것도 먹을게."

그렇게 말하고는 애초에 내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닌 모양인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청첩장을 삼켰다. 그리곤 익숙하게 내 두 뺨을 감쌌다.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것 같이 포근했다. 주책스럽게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녀석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내 손보다 훨씬 큰 손등을 매만졌다. 녀석이 나를 향해 픽 웃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나의 네번 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입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는 그것을 먹었다.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에 파묻혔다. 머릿속에 아무 것도 없었다. 구름 위에 선 기분이었다.


"키스해줘."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그랬다. 녀석이 내 아랫입술을 물었다.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은 체향이 전해졌다. 콧김에서 나는 숨 냄새가 달콤했다. 나보다 키가 훨씬 커진 녀석이 목을 굽혀 내리곤 내 혀를 찾았다. 서로 엇갈린 고개짓으로 조금 급하게 혀를 부딪쳤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쩌면 전율이라고 부르는 감각일 수도 있겠다.

"……."
"……."

한참동안 타액을 섞으며 입맞추던 우리가 아쉽게 떨어졌다. 내게서 거친 숨소리가 났다.




*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닮아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이제 무얼 더 먹을 거야?"

녀석이 잠시 고민하더니 씩 웃었다. 그리곤 내 어깨를 잡았다.

"너."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얼굴을 가진 녀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 누군가가 내 전부였구나.
죽음은 어느덧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기꺼이."



















전부라는 것  fin.











(+)

너는 나. 나는 너. 내 전부.



Havana  | 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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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 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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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 180311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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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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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ㅊ
 | 180630  삭제
그에게 먹혔군여.
나를 전부 내줘도 아깝지 않은 너
너와의 합채
함께  | 18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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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가즈아  | 1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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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윤
 | 180927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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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서  | 18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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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co  | 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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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y  | 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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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라기  | 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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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줌마  | 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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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밍  | 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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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  | 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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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세상  | 1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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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 1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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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 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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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  | 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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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꽃  | 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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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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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yn  | 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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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행복  | 1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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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오늘 하루동안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