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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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랠리 씀





비망록










1945년 8월 15일 수요일
지민. 보고 있는가. 드디어 해방되었네.



그때의 지민은 스물한 살이었다.

나는 해가 저문 길을 걸었다. 근래에 일제가 통금 시간까지 내려가며 민족 운동을 감시하던 탓에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통금이 반 시진 정도 남아있었다. 정신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어느새 낯선 골목에 들어섰다. 그곳은 간판불이 하나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나는 후미진 골목을 떠돌았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여있는 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이 도시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으니.

그때였다. 갑자기 한 남자가 팔을 덥석 잡아 왔다. 깜짝 놀라 잡힌 팔을 어쩌지도 못하고 몸을 돌렸다. 달빛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사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키가 두 뼘 정도 작았고, 어깨뼈가 셔츠 바깥으로 툭 불거져 나와 있을 정도로 비쩍 마른 사람이었다. 푹 눌러 쓴 체크무늬 모자 밑으로는 하얗고 뾰족한 턱이 보였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50전이오.”

그때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덜 여문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지민이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몰골을 하고는 늘 눈두덩을 반쯤 풀고 앉아있는 것이 영 거슬렸던 이였다. 딱히 말을 섞을 만한 사이가 아님에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늘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무엇이?”
“이 골목에 오는 이유는 하나지.”
“…….”
“이틀짜리도 가능하오. 그건 80전.”

그러니까, 지금 상황 같은 소문 말이다. 나는 그제야 어두운 골목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소문으로만 듣던 창가(娼街)인가 싶었다.





*






‘몸을 파는 가난뱅이 조센진이 있다.’

이 짧은 문장은 경성제대 안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구전의 통로는 주로 일본인이었다. 경대에는 일본인 학생 수가 조선인보다 월등히 많았다. 학내 패권을 장악함은 물론, 분위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들의 주둥이는 늘 지민을 향해 열렸다.

‘조센진은 역시 자존심이 없어.’
‘여자든 남자든 배가 고프면 입을 벌려야지.’

그들은 조악한 일본말을 지껄이며 지민을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을 꾹 닫고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겼다. 나는 대각선에 놓인 그의 책상을 물끄러미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혹여 일본인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동요하지 않는 작은 어깨가 영 신경 쓰였다.

‘이봐. 오늘 밤에 만날까?’

무뢰배는 정신없이 낄낄거리며 지민의 앞을 서성였다. 이 역시 지민의 반응은 없었다. 가장 내 심기를 건드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한참을 고고하게 조롱받다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다리를 벌리는 것. 얼마나 배가 곯으면, 얼마나 자각이 없으면 그런 일을 다 할까 싶었다. 이런 생각에 미치면 곱다란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 법.
매일 일본인들이 못살게 구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






“경성제대 학생 아닌가?”

내가 그에게 대뜸 그랬다. 지민은 그 소리에 모자 끝을 올려 나를 뚫어져라 올려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 감춰진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내가 누군지 기억해낸 듯 눈이 커졌다.

“전정국?”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이런 곳에서 동기에게 호객질을 한 일에 자괴감이 들었으리라.

“이틀짜리가 80전? 책 두 권 값이군.”
“…….”

나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이번엔 반대로 내가 그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지식인이 어찌 이런 일을 하지?”
“놔. 부잣집 샌님은 모른다.”
“부잣집인 건 또 어찌 알고?”

의미 없는 물음으로 이어가자 지민이 난감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짜증 섞인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라가 이 꼴인데 지식인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가 눈을 빨갛게 떴다. 나는 그 말에 실소가 터졌다. 그의 손목을 꽉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더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간 그와 눈을 맞췄다. 시선을 똑바로 부딪쳐 오는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처음으로 지민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늘 뒷목과 어깨만 구경했기에 조금 낯선 느낌이 들었다. 험한 일은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고운 얼굴. 내 등 뒤에 떠 있는 달이 그를 비추자 뺨에 가득한 솜털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과연 그것이 남자의 구미를 당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책값에 몸을 던지는 건 어리석지 않나.”

나의 힐난에 그가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당당한 표정 변화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지민이 손목을 비틀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신경질적으로 잡혔던 손목을 매만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에게 동정심이 생김과 동시에 화가 났다. 우리 민족의 얼굴에 먹칠한 주제에,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지민의 가슴께를 팔로 누르며 건물 벽으로 밀어붙였다. 흠씬 두들겨 패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 거요, 말 거요?”

그는 내가 으르렁거리는 표정으로 쏘아보든 말든 흔들림이 없었다. 단호하게 자기 할 말만 간단하게 전했다. 쓸데없이 기개가 나오는군. 그의 모습에 나는 오기가 생겼다.

“하지.”





*






50전을 받아 든 지민은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앞장섰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어둡고 구석진 미로를 걸었다. 거 되게 꽁꽁 숨어서 그 짓들을 하는군. 나는 말 없이 비죽거렸다. 한참을 걸어 콧등에 땀이 배어날 때쯤 지민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가 어두컴컴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지하로 향했다. 이윽고 지민은 굳게 닫힌 철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나는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 녀석을 어찌 혼내줄까. 다짜고짜 아구창을 날려줄까.

“들어와.”

낡은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기함했다.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수십의 사내들이 탁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을 포장하고 있었다. 주로 엽총이나 화약 같은 무기였고, 그것들을 단단히 싸매서 사카린 자루나 된장독 안에 위장해 넣었다. 나무 박스를 옮기는 소리, 무기를 손질하는 소리, 여기저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뒤섞여 귓가에 웅웅거렸다. 손이 달달 떨렸다.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습은 감히 내가 꿈꾸지 못한 밀정 행위였다.

지식인이 어찌 이런 일을 하지?
나라가 이 꼴인데 지식인이 다 무슨 소용이야.

지민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그깟 일본 놈들의 몇 마디 조롱에 지민을 어찌 생각한 것인가.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지민을 향한 것이기도 했고, 우리 민족을 확단한 것에 대한 고통이기도 했다.

“청산리까지는 이틀 안쪽으로도 가능해. 만주 기지는 사흘 말미는 줘야 하고.”
“…….”
“그런데 물건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군 기지로 향하는 그의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버티고 굳어 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지민이 나를 데리고 기지 밖으로 나갔다.

“왜 그래?”
“…….”
“배달을 보내려던 게 아니었구나.”

내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자 지민이 품에서 50전을 꺼내 내 셔츠 앞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네.”

그가 샐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투를 도통 읽을 수 없었다. 창피함이 몰려왔다.

“너도 날 그렇게 본 거야. 그치?”

지민이 팔짱을 끼고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나는 해명을 해야 했다. 널 그런 대상으로 보아서 돈을 준 것이 아니라고. 그저 철문을 열고 들어가 따끔하게 혼내주려고 했던 거고… 머릿속으로 나오던 말들이 끊겼다. 도저히 해명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냐 난…”
“전정국.”

그래 맞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샌님인 줄만 알았는데.”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






“정국아. 듣고 있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천천히 나타났다. 지민을 떠올리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말없이 찻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영 불편했다. 아버지의 옆에 앉은 일본인 중매쟁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나도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후미코 씨가 방년 몇 살이고, 외모는 어떠한지, 요즘은 어떤 시에 빠져있는지 등등의 이야기였다. 나는 멍하게 한 귀로 흘리며 아버지의 제복에 견장이 몇 개인지 눈으로 세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또다시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도 날 그렇게 본 거야. 샌님인 줄 알았는데. 그다음 말이 뭐더라. 연락하라고 했던가. 연락하겠다고 했던가. 어떻게 연락을 하지? 서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머릿속이 또 지민으로 가득 찼다.

어머니가 내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아버지의 눈이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관심 없는 혼담 따위에 잡혀있기엔 마음이 너무 혼잡했다. 한 시진 정도 산보를 하고 온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나는 앞에 놓여있는 찻잔을 들었다. 조금 뜨거운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






지민은 수업에 오지 않았다. 그의 빈자리가 수업 내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일과를 마치고 인파에 뒤섞여 터덜터덜 걸었다. 사람의 숫자가 조금 줄어들 즈음, 별안간 모자를 쓴 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지민이었다. 그가 내 팔을 잡고 다짜고짜 인적이 없는 건물 뒤편으로 끌고 갔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갔다.

“열흘 후에 간다. 상해로.”

그가 대뜸 그랬다. 눈은 나른했지만, 눈빛은 말갛게 빛났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목석인가 보군.”

내 대답을 기다리던 지민이 피식 웃고는 내게서 몸을 돌렸다. 나는 며칠 동안 그가 내 머릿속을 어지럽힌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가 가지 못하게 손목을 얼른 잡았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내 말에 지민이 고개를 한쪽으로 꺾으며 표정을 편하게 풀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지.”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누가 아니?”
“네가 듣고 싶은 말은 뭔데.”

지민이 위아래 입술을 스스로 짓누르며 말을 고르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 그러나 금방 그에게 들켜버렸다. 눈빛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지민이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살아서 와 라던가….”
“…….”
“같이 가자?”
“…….”
“그 전까지 함께 있자 도 괜찮고.”

마음이 이상해졌다.

“마지막 걸로 하지.”
“푸흐….”
“함께 있자.”

무슨 용기가 샘솟은 건지, 그의 손을 잡았다.





*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부대꼈다. 눈빛이 붙자마자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내 다리 위에 올라타 있는 그의 하얀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정하게 빗은 그의 동그란 머리통이 내 손에 의해 흐트러졌다. 까만 머리가 제멋대로 삐죽하게 망가졌다. 지민의 가느다란 뒷목을 잡고 입술을 강하게 붙였다. 그가 두툼한 입술로 내 아랫입술을 빨았다. 숨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그의 셔츠가 벗겨져 내려가고 마른 상체가 드러났다. 갈비뼈가 여실히 드러나는 알몸에 입술을 댔다. 그가 시선을 낮춰 나를 내려다보며 팔을 목 뒤로 감았다.

“언제부터야?”
“뭐가…?”
“나를 쳐다보던 거.”

그의 물음에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잘 모르겠다. 아마도 네 소문이 시작되던 때부터인 것 같다.



내가 가슴께에 입술을 가져대고 빨자 그가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내뱉었다. 너는 내 이름을 어찌 알았니.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학교에서 너를 모르는 이는 없어.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의 기지 안은 조용했다.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것인지, 나무 상자가 열을 맞춰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빈 공간에서 우리는 담요 한 장을 깔고 하나가 되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결합이었다. 달뜬 숨이 부조화를 이루며 섞였다. 언제 이렇게 흥분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 신체 부위가 찰박찰박 부딪치는 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나의 몸을 넣은 채 부둥켜안고 있는 것에 세상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움직임이 덧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지민은 턱을 올려 내게 입 맞추며 숨소리가 가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용기 내길 잘했어.

네가 말한 것은 우리 둘 중 누가 낸 용기일까.





*






정사가 끝난 후 우리는 구겨진 담요 위에 누워 몸을 떨었다. 내가 그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몸이 한 품에 와 안겼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어찌 험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버지를 통해 한인애국단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에겐 그들이 늘 성가신 존재였다.

“나를 왜 싫어하지 않았어.”

내가 물었다. 일본군 간부인 조선인의 아들. 그런 나를 왜 품었니.

“너도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대답했다. 달라붙는 일본인 몇 놈을 혼내주었는데 그 대가는 험한 소문이었어. 그런 나를 왜 품었니.

우리는 며칠 동안 수업이 끝나면 비어있는 기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입을 맞추고 몸을 나누며 하루하루 더욱 깊어졌다. 나중에는 그를 향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나는 날짜가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못했다. 대업을 기다리는 이에게 내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






지민을 귀찮게 하는 무리들이 또다시 그에게 추근거렸다.

“요즘 붙어먹는 놈이 있다던데.”
“더러운 조센진끼리.”

그는 언제나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민의 손목을 잡아채거나 어깨를 만지며 지껄이는 것이 보였다. 내 마음속에 폭풍우가 불었다. 이성이 마비되었다. 드륵 하고 걸상이 끌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결국, 성큼성큼 걸어가 지민의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일본인에게 주먹을 날렸다. 순식간에 아무렇게나 뒤엉켰다. 몇 대를 때렸는지, 몇 대를 맞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개싸움을 하며 헉헉거리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령관 다나카 사토루의 아들. 전정국.

소름이 돋을 만큼 싫었다.





*






지민이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새 딱지가 진 입술에 약을 발랐다.

그가 내게 부탁을 했다. 아버지의 집무실에 가서 서류 하나를 가지고 오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러마 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집으로 달려가 몰래 아버지의 책상을 뒤졌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다 잘 될 거야.





*






그가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그가 앉아있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기를 입에 넣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싼 채로 턱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눈에 새겼다.

“박지민.”

그의 이름을 부르자 행동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로 얼굴을 끌어당겨 끈적하게 입을 맞췄다. 헤어지기 싫다. 함께 갈까. 나는 다 필요가 없는데. 그의 몸을 들어 내 몸 위에 맞춰 앉히면서 뜨겁게 파고들었다. 또다시 하나가 되었다. 뜨거운 살덩이를 마찰하며 끝없이 너를 찾았다. 영원히 끝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내 위에서 팔딱거리며 움직이는 허리를 잡고 상념에 잠겼다. 생각의 연장은 하나의 소실점이 되었다.

상해에 가자. 그와 함께하자.





*






지민은 다른 사람들과 뿔뿔이 흩어졌다. 준비해둔 무기 박스를 화물칸에 싣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그의 손을 잡았다. 편하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 물어온다면, 지민 말고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환멸 나는 시대다.

그와 나란히 기차에 올라탔다.

“괜찮겠어?”

지민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에 깍지를 꽉 꼈다. 누군가 묻는다면 종국에는 조국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 실은 내 조국은 지민이었다.

기차가 출발하려는 듯 증기를 무섭게 토해냈다. 그리고 험악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눈앞에 선 사람은 일본 군인이었다. 그들이 나를 붙들었다. 총구를 들이대며 위협하는 통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질질 끌려 나오니 많은 군인이 이미 이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지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민의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고,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나는 끌려가는 내내 그를 찾았다.

지민. 도망쳐.





*






형무소에 갇힌 내게 최고의 걱정거리는 지민이었다.
상해에 갔을까. 네가 원하는 대로 잘 하고 있을까.

어느덧 두 해가 지나버린 겨울이었다.





*






1945년 8월 15일 수요일

지민. 보고 있는가. 드디어 해방되었네. 형무소를 나오는데 더운 바람이 끼쳤어. 들어갈 땐 한기가 매서웠는데 말이야. 지금 어디에 있어? 이 서신을 본다면 답을 줄래. 살아있다 네 글자면 되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네게 그 정도는 되지 않았는가.

















비망록 fin.


(+) 상단 그림은 갈랑트님께서 선물해주셨습니다.

전국은만개해  | 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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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누나나  | 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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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지람no.521  | 1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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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한노인  | 1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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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 18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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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ana  | 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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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Dr  | 180226   
ㅠ 지민이 죽지않았길. 차라리 정국을 배신한거였으면. 하는 마음이네요. 일제시대물을 좋아하는편이라 설레는맘으로 읽었어요. 여운이 많이 남는글이라고 쓰고 싶은데 정확히 무엇이 여운에 남는거지? 저도 잘 모르겠는것인지라 한번 더 읽어봐야하는것같습니다. 글의 분위기도 넘 좋네요
달빛  | 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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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전  | 1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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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튜하튜  | 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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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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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랠리님  | 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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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 18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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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 1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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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미  | 18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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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둥이  | 19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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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웅냥  | 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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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y  | 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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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라기  | 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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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틴  | 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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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주  | 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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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  | 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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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아누나라고불러봐  | 1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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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밍  | 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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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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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짐  | 1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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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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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  | 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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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 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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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cc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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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난  | 1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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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 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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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오늘 하루동안 보지 않기